[에딧머니]
차세대 한류가 '막걸리'?
막걸리 '리노베이션' 이끄는 막걸리 '파이오니어' 배혜정도가
이 기사는 2022년 06월 20일 14시 51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 플러스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딜사이트 이현서, 박수혁 기자] 'OO생주.'

이 술은 일생을 전통주를 위해 헌신한 故배상면 회장의 생애 마지막 역작인 'OO주'를 바탕으로 딸인 배혜정 대표가 아버지 이념을 계승하여 만든 프리미엄 생탁주입니다.

여기서 '다시 누룩을 생각하다'라는 뜻인 故배상면 회장의 호이기도 한 OO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우곡'입니다. 배혜정 대표는 오빠인 국순당 배중호 회장, 동생 배상면주가 배영호 회장에 이어 배상면 가문에서 마지막으로 주조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제조부터 유통까지 유독 까다로운 막걸리 사업에 뛰어들어 숱한 고비를 넘기고 버텨온 세월이었는데요. 배혜정도가는 막걸리의 고급화와 세계화를 선도한 업체로 작지만 강한 기업으로 단단히 자리 잡았습니다. 에딧머니는 배혜정도가의 20여년의 역사, 그리고 오늘의 배혜정도가를 있게 한 배상면 회장이 남긴 유산을 여러분께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경기도 화성 배혜정도가 양조장을 방문, 배혜정 회장을 만나고 돌아온 만큼 따끈따끈 한 이야기 시작해보겠습니다.


배혜정 대표는 누구?

배혜정 대표는 올해 66세. 마흔 살에 아버지 권유로 막걸리 사업에 뛰어들어 26년째 배혜정도가를 이끌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 아버지가 누구냐. 한국 전통주의 레전드로 불리는 고 배상면 회장입니다. 배상면 회장하면 백세주 떠올리실텐데요. 사실 배 회장의 평생 꿈은 막걸리였습니다. 프랑스의 대표주 와인처럼 막걸리를 한국의 대표 술로 만들고자 했죠. 그리고 그 꿈을 국순당과 배상면주가를 각각 이끌고 있는 두 아들이 아닌, 주부였던 딸 혜정에게 심었습니다.


막걸리의 역사

막걸리는 쌀과 누룩, 물을 기본으로 한 잘 빚어진 술을 막, 바로 걸러낸 술인데요, 기원이 삼국시대 이전으로 추정될 정도로 역사가 깊고, 문헌에 등장한 건 고려때부터라 하고요. 걸쭉하고 탁하다 해서 탁주, 빛깔이 사골마냥 뽀얘 백주, 인목대비 어머니가 유배지에 술지게미를 팔아 연명했다 해서 모주, 집집마다 담가 먹는 술이라 해서 가주, 농사꾼이 새참으로 먹는다 해서 농주로도 불릴 정도로 이름도 다양했고요.


막걸리하면 서민 술이기도 하지만 왕의 술이기도 했죠. 철종과 연산군이 유독 즐겼고, 대통령으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막걸리 마니아였죠, 일명 막사라고.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도 나오는 유명한 장면인데 박 대통령이 막걸리와 사이다를 섞어먹는 막사를 좋아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막걸리 사랑이 대단했죠.


홀대받은 막걸리, 왜?

이렇듯 온 백성이 다 마시는 술이다 해서 국주로도 통했던 막걸 리인데, 지위는 초라합니다. 2020년 기준 주류 시장 규모가 8조8000억원. 이 중 소주 맥주가 7조2000억원. 막걸리는? 4700억원이었습니다. 겨우 버티는 거에요.


일제강점기 가정에서 술 빚는 '가주'를 금지하고, 양조업자들을 착취하다 못해 아예 양조업 자체를 금지해버렸죠. 해방후 간신히 명맥만 이어오다 전쟁마저 터지니. 쌀이 어딨었겠어요. 양곡관리법이 생겨서 쌀로 막걸리를 못 짓게 정부에서 법으로 막았죠. 그렇게 수십년 암흑기가 흘렀죠. 그러다 미국에서 원조받은 밀로 밀 막걸리를 빚으면서 살아납니다. 원가가 거의 안 드니 가격이 무지 쌌겠죠. 밀 막걸리는 텁텁한 스타일인데, 목젖을 때리는 맛이다 해서 터프한 목넘김을 사람들이 좋아했다 해요. 술 먹는 사람 10명 중 6~7명은 막걸리를 마셨어요. 그러다 카바이드 막걸리 파동이 있었죠. 발효 시간을 단축하려고 공업 원료 카바이드를 섞은 막걸리를 유통하는 업자들이 있었다는 건데. 음모론이다 뭐 이런 얘기도 뒤늦게 나와요. 어쨌거나 밀막걸리를 마시면 다음날 머리가 깨질 것 같다는 얘기가 돌았죠.


80년대 들어서면서 막걸 리가 밀리기 시작합니다. OB생맥주가 나오고 생맥과 치킨 조합이 막걸리 파전을 밀어내기 시작하죠. 90년도 들어 쌀 제조를 허가하면서 쌀 막걸 리가 다시 나왔지만, 쌀로 밀막걸리 가격을 맞출 수가 있나요. 비싸니 또 외면당하고. 한때 70%까지 가던 점유율이 2%로 추락합니다. 대중 입맛은 소주 맥주로 넘어가버렸죠.


WTO 가입 이후 쌀 의무 수입까지 더해지면서 쌀은 남아돌고, 이걸 소비하겠다고 정부가 뒤늦게 막걸리 육성책을 막 내놓죠. 막걸리 세계화다 뭐다. 농림수산식품부가 외국인들한테 어필하게 이름부터 바꾸자해서. 공모로 채택한 이름이. 드렁큰 라이스(Drunken Rice). '술 취한 쌀'이란 이름으로 말이 많았습니다.  


짧은 유통기한, 싼 가격 

막걸리 자체의 특성상 불리한 점도 많았고요. 소주 맥주 유통기한? 없어요. 맥주는 품질보증기한이라고 1년 표시되긴 하는데. 유통기한은 아니거든요. 막걸리는 길어야 보름이에요. 살균 막걸리라던가 일부 예외가 있긴 하지만요. 보름 안에 팔리지 앟으면 다 폐기처분해야 하는데. 막걸리 사업에 뛰어들기도, 또 그 막걸리를 받아 팔기도 부담스러운거죠.


가격이라도 그럼 제대로 받아야 하는데. 테라 500밀 리가 1990원인데, 국순당 생막걸 리가 750밀리에 1440원이에요. 소비자 입장에서야 좋죠. 근데 내가 판매자다 생각하면. 아찔한데요. 막걸리를 낮춰 부르는 말로 '박주'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야말로 박하게 취급 받고 있는 거죠. 이래서 도저히 안되겠다. 이걸 바꿔보겠다 나선 인물이 바로 배혜정 대표입니다.


배혜정 대표의 막걸리 입문기 

일단. 배상면가는 두 아들이 각각 국순당과 배상면주가를 이끌고 있는 배중호 배영호 회장인 거 아실거에요. 1952년 배상면 회장이 숙부에게 돈을 빌려 기린주조장을 사면서 이 가문의 양조업은 시작됐고요. 국순당 전신인 배한산업에 두 아들 다 몸담았고, 둘째가 나가면서 배상면주가가 탄생했었죠. 딸 혜정에겐 어떤 콜도 하지 않았었죠. 혜정은 현대건설에 다니는 남편을 따라 일본, 파키스탄 등 해외생활을 오래했고요. 그런 그녀에게 돌연. 배상면 회장이 사업을 권합니다.


그게 1998년 혜정이 마흔의 일이에요. 당시 백세주가 한참 히트일때거든요. 그런데 부친 왈. 약주를 개발해 백세주가 나왔지만, "내 꿈은 막걸리다. 네가 막걸리를 빚어라"하신 거에요. 그도 그럴게 장남은 백세주만으로도 정신이 없었고, 차남도 산사춘 등 다른 술로 여력이 없던 때였어요. 그녀도 더 늦기 전에 무언가를 시작하잔 생각은 하고 있던 차였죠.


그렇게 막걸리 사업에 뛰어듭니다.

국순당 딸이니 쉽게 시작했겠거니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국순당 연구실 연구원들한테 균 배양부터 시작해 전 공정을 배우게 했고, 일흔 다섯인 당신이 직접 교관을 자처. 스파르타식으로 교육을 실시했죠. 전전긍긍이 안 좋은 말인데, 술 사업만큼은 전전긍긍해야 한다는 아버지 말씀이 하나 틀린게 없었고요. 발효주다보니 온도, 습도, 세척, 뭐 하나라도 까딱 잘못하면 술을 버려야 했으니까요. 마치 무림의 고수가 되기 전까지 혹독한 훈련을 이겨내야 하듯, 노장의 노하우를 스폰지처럼 흡수해 1년 뒤 하산을 허락받습니다. 


"네 술을 빚거라."

그렇게 2001년 배혜정도가가 탄생했어요. 배혜정 대표는 막걸리는 머리 아픈 술, 가난한 사람들의 술 이란 고정관념을 깨리라 마음 먹었거든요. 고급화, 곧 죽어도 고급화였어요. 고급화의 전제. 첫 번째. 최상의 재료겠죠. 거기에 기술력이 더해지고. 다음은 포장의 고급화겠죠.


당시 막걸 리가 어땠냐. 수입쌀 쓰는 게 당연했고요. 페트병도 개선된 거였고 그 이전에는 비닐병이라고 환경에도 건강에도 안 좋은 용기를 썼단 말이에요. 


그래서 야심차게 내놓은 첫 작품. 이름은 '새콤달콤 옥 막걸리.' 최상의 재료로 도전한 제품이었어요. 국산쌀과 국산찰옥수수를 배합한 살균 막걸리였고. 맛은 담백하고 고소했어요. 결과는 대실패였습니다.


음식점에서 선뜻 받겠어요. 처음 보는 메이커인데. 아무리 국순당 딸이라도 그렇잖아요. 소주업체는 냉장고 술잔 앞치마 까지 다 마련해주면서 신제품 넣어주는 마당인데. 그럼 직접 팔아보자 해서 제부도 유원지에 매대도 깔아봤어요. 단 한 병도 안 팔리더랍니다.


아버지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맛을 보시더니. "왜 좋은 재료로 싸구려 대열에 끼려 하느냐. 이도 저도 아닌 막걸리다"라고 혹평했어요. 그러면서 "뭘 하고 싶냐." 물으셨데요. 그녀는 "세상에도 없는 특별한 막걸리를 만들겠다"고 답했어요. 아버지는 팁을 줍니다.


합주, '부자' 막걸리의 탄생 

아버지는 '합주'를 제시했어요. 합주는 탁주와 약주 가운데 즈음인 막걸리로, 수랏상에 오를만한 고급 막걸리입니다. 양반의 술상을 떠올리며 제품 개발을 시작했죠. 이 때 쓴 연구개발 노트만 100권. 지금은 프랑스 파리 명품백화점 라파예트 갤러리에 유일하게 들어가 있는 한국 술. '부자' 막걸 리가 바로 이 합주입니다. 이름도 대놓고 부자라고 지었죠. 혹시나 아버지와 아들로 혼동할까 한자로 적었습니다. 최고급 쌀은 기본이고 이번에는 용기까지 바꿉니다.


병 막걸리의 탄생입니다. 막걸리를 병에 담는다? 대단한 파격이었어요.


시제품을 거래처에 풀었어요. 며칠 뒤 전화통에 불이 났습니다. 대성공일까요? 아니오. 술병이 터져 걸려온 클레임 전화였답니다. 생막걸리로 발효 과정에 터져버린건데, 생막걸리용 병뚜껑을 미처 구하지 못해 자폭한 셈이죠. 어찌됐건 병뚜껑도 해결하고 부자 3000병을 만들어 유통했으나. 이번엔 대중이 외면합니다. 일단 비싸죠, 양은 적죠, 병막걸리 처음보지. 맛을 보니 또 익숙한 막걸리 맛이랑 영 딴판이지. 매달 적자가 1000만 2000만원씩 났고, 그렇게 2년 지나니 직원 한 명 남더랍니다. 사무실 얻을 돈도 없어 전전긍긍할 무렵.


은인이 나타나면서 살아납니다.

부자를 가끔 사가던 남대문 상인이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더라고 귀띔해준 것이 계기가 되어. 밑져야 본 전이다. 일본에서 산 경험도 있고 하니 일본에 나가자 해서. 농산물 유통공사를 찾아갔어요. 2003년 일인데, 일본 국제식품박람회에 나갈 기회를 잡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박람회에 갔는데. 거의 끝물에 한 일본 업자가 관심을 보여 계약을 했습니다. 가격도 제시한 대로 쳐주고요. 이후 수출이 시작됐죠. 2005년에는 대지 1300평 건평 200평 규모 공장을 화성에 짓습니다.


제조시설이 생기자 가장 기뻐한 사람은 아버지였고요. 여든이 넘은 아버지는 공장 한 켠에 방을 만들어 숙식을 하며 딸을 돕습니다. 온기도 없던 방에서 말이죠.


최대 고비, 건강이상

그러다 배혜정도가를 포기하는 순간이 옵니다. 건강에 이상이 생긴거죠. 스트레스로 마비 증상이 온겁니다. 그런데 막상 팔려고 하니 원 부동산값 말곤 쳐준다는 겁니다. 8년을 죽을만큼 고생했는데 말이죠. 다시 이를 악물었죠.


아버지는 그녀를 끝까지 도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유작을 유산으로 물려줍니다. 바로 '우곡주'였어요. 우곡은 또다시 누룩을 생각한다는 호로 다시 태어나도 누룩으로 술을 빚겠다는 배 회장의 각오이기도 합니다. 그런 자신의 호를 딴 막걸리 우곡주를 완성해, 두 아들이 아닌 딸에게 줍니다. 2009년 배상면 회장의 평생의 노하우가 담긴 우곡주는 세상에 나왔고, 만 사천원의 부담스런 가격 그리고 13도의 높은 도수로 비록 대중화엔 실패했지만, 우곡주는 배혜정도가를 일으켜세우는 원천이 됩니다.


이후 배혜정도가에선 햅쌀로 만든 호랑이 막걸리 등 다양한 제품이 쏟아져나왔고. 아스파탐 없는 쌀 막걸리로 웰빙 붐을 타면서 찾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중국, 호주 , 베트남, 싱가폴 등 세계로 제품이 수출됐고, 50만불 수출탑상도 받습니다.


2013년 하지만 그녀의 버팀목이자 스승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죠. 작고하기 네 시간 전까지도 누룩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누룩 이야기를 전했다고 하는데요. 마지막 10여년은 어쩌면 누룩과 막걸리를 잇는 딸에게 온전히 노하우를 전수하는 시간이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사후에 맺어진 결실

2014년 배혜정도가의 유자생막걸리와 부자10도는 세계 3개 품평회인 몽드셀렉션에서 은상을 수상했고요. 국내의 생막걸리 관련 상은 전부 배혜정도가가 휩쓸다시피 했습니다. 2017년엔 막걸리 고급화에 기여한 공로로 '산업포장'을 수여받기도 했습니다. 


우곡주가 세상에 나온 뒤 꼭 10년이 지난 2019년.

우곡주를 기반으로 한 '우곡생주'가 나왔고, 이 제품은 농식품부 우리술 품평회 탁주부문 대상을 수상하면서 히트칩니다. 지금 배혜정도가의 대표술을 우곡생주고요. 어떤 감미료도 넣지 않고 쌀과 누룩, 그리고 약간의 물의 배합. 그리고 생막걸리입니다.


약주의 기본인 막걸리로 세계화하라는 선대의 가르침, 그리고 이 가르침을 이어받아 기본 아이템으로 승부를 본. 가족 중 가장 늦게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가장 빨리 어쩌면 정점에 도달한 인물이 배혜정 대표였습니다. 이제는 오빠도 동생도 각각 국순당생막걸리와 느린마을로 막걸리 사업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너무 앞서가서 탈이었던, 그리고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은 막걸리 기업. 배혜정도가.


현재는 아들 김백규 이사가 실무를 총괄하며 사실상 3대째, 숙부때부터 감안하면 4대째 가업을 잇고 있고요. 아들은 모친 그리고 조부의 피를 물려받아 새로운 도전을 감행중입니다. 증류소주 로아, 도래하 등 쌀을 기반으로 한 소주로 눈을 돌린건데요. 올해 나올 비장의 무기도 소주로 예상됩니다. 막걸리로 끝까지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배 대표는 우곡주가 있지 않느냐고 답했습니다. "아버지의 우곡주로 이미 이뤘다."


실적은?

여전히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올 들어 주문이 크게 늘어. 40억원대 매출을 바라본다고 합니다. 지난해보다 두 배 성장입니다. 올해는 노후화된 공장도 새로 짓고 굵직한 신제품을 내놓겠다 하네요. 


그녀에게 막걸리는 '아버지'라고 합니다. 이상으로 우리나라 누룩의 역사이자 전통주의 레전드인 고 배상면 회장의 정신과 노하우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딸. 배혜정 배혜정도가 대표의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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