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퇴장의 미학
VC협회장 자리 놓고 업계 분열...갈등 봉합, 대의 위한 공조 필요
이 기사는 2023년 03월 08일 08시 24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 플러스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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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사이트 오동혁 IB부장] 패자의 퇴장은 늘 어렵다. 고통스런 과정이 수반돼서다. 일단 물러날 때를 정하는 게 쉽지 않다. 때를 알았다 해도 행동으로 옮기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자연스레 자존심 영역으로 넘어간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곧 물러나는 자의 품격(品格)이 빚어낸 결과물로 볼 수 있다.


감투가 걸린 일엔 더 민감하다. '벼슬에 욕심 내지 않고 진정성을 담아 물러난다'는 퇴계 이황의 '진휴(眞休) 정신'은 그야말로 공자님 말씀. 나 자신 뿐 아니라 내 지지자들의 입장도 고려해야 한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두루 살피며 예우해야 하는 것만큼 골치 아픈 일이 없다.


지난달 벤처캐피탈 업계에선 '감투'를 놓고 한바탕 힘겨루기가 있었다. VC협회장 얘기다. 사실 협회 출범 후 20여년간 회장은 그야말로 명예직에 불과했다. 실질 권한이 없다보니,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저 업계 원로들이 '봉사·헌신'의 개념으로 돌아가며 맡았다. 


VC업계가 급성장한 영향일까. 허울에 불과했던 협회장이 돌연 벼슬이 됐다. 사상 최초로 복수 후보가 출사표를 던지며 경쟁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갖은 잡음이 일 정도로 경선은 치열했다. 그래도 강한 의지의 후보들이 나섰단 점은 업계 발전에 긍정적이란 목소리가 많았다. 


경쟁은 끝까지 갔다. 협회 1차 이사회에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다시 열린 2차 이사회에선 결국 표결로 이어졌다. 내부 관계자에 따르면 의결권을 보유한 참석자 29표 중 과반인 15표가 윤건수 후보를 찍었다. 업계 이목이 집중된 협회장 경선이 결국 한표차 승부로 갈린 것이다. 


겉으로 보면 낙마한 후보 입장에선 아쉬울 만한 결과다. 그런데 이 또한 면면을 뜯어보면 그리 억울할 일도 아니란 게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당선자 윤 후보측과 달리, 다른 후보는 자신이 직접 투표권을 행사했다고 한다. 자신에게 한표를 던지고도 졌으니 유구무언이다.


끈끈했던 VC업계는 이번 협회장 선임을 두고 한순간 둘로 분열됐다. 이제야 말하지만 편가르기와 흡집내기가 어느 정치판 못지 않았었다. 업계 발전을 위해 힘을 모으는 협회 '본질'을 되새기려면 봉합 과정이 필수불가결해 보였다. 승자에게 박수 쳐주는 넓은 아량이 기대됐다.


그러나 이후 행보는 큰 아쉬움이 남는다. 지난달 17일 협회장 이취임식에 낙마한 후보와 그를 지지했던 인사 여럿이 나타나지 않았다. 단기간 쌓인 감정을 한번에 털어버리고 대의를 위해 화합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 사라졌다. 실기(失期)는 늘 뼈아프다.


VC업계에 공공연히 떠도는 얘기가 있다. 유대가 탄탄한 사조직이 있는데 서열 또한 명확해 태상왕·상왕·왕 등으로 불린단 것. 태상왕, 상왕은 협회장을 역임한 원로고 이번에 왕을 세우려다 실패했단 게 골자다. 호사가들의 우스갯소리로 치부하기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구태(舊態)는 발전의 발목을 잡는다. 윤건수 신임 VC협회장은 취임식에서 혁신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30년 넘게 사용해 온 한국벤처캐피탈협회 기관명을 한국벤처투자협회로 변경하겠단 공약을 포함해 7개 핵심과제도 밝혔다. 기존 체제에서 탈피한 대격변의 예고다.


옹립에 실패한 왕조는 역사 속에 묻힌다. 변화의 새 바람 앞에 퀘퀘 묵은 유산 또한 흩날릴 수밖에. 일순간 뒤안길로 밀리느니, 한발 떨어져 '한국 벤처투자 혁신'에 일조하는 건 어떨까. 퇴장은 어렵지만, 공조(共助)는 쉽다. "이끌거나 따르거나 비켜서라"(CNN 창업주 테드 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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