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고래 싸움에 불안한 새우 등
대형 운용사 ETF 수수료 인하 경쟁 치열…규모 작은 운용사 속수무책
이 기사는 2024년 05월 09일 08시 21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 플러스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출처=언스플래시)


[딜사이트 이규연 기자] 향유고래는 현존하는 이빨고래 중 몸집이 가장 크다. 기록상으로 가장 큰 향유고래는 길이 18m에 몸무게만 57t 가까이 나갈 정도다. 같은 향유고래 수컷끼리 경쟁이 붙으면 박치기나 이빨을 동원해 사납게 싸운다. 말 그대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고래 싸움'을 실제로 벌이는 동물이다.


기업 간의 경쟁은 흔히 고래 싸움으로 종종 일컬어진다. 특히 기업의 규모가 클수록 고래 싸움으로 빗댈 확률도 높아진다. 달리 말하면 이빨고래 중 가장 큰 향유고래가 오랫동안 치열하게 다툴 수 있는 것처럼, 체급이 있는 기업일수록 심화되는 경쟁과 그 여파에서 오래 버티기 쉽다. 고래나 기업이나 '규모의 경제'가 적용되는 셈이다.


이런 고래 싸움이 국내 ETF(상장지수펀드) 시장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향유고래의 무기가 박치기와 이빨이라면 ETF 시장 경쟁에 참전한 기업의 무기는 수수료 인하다. 특히 삼성자산운용과 미래에셋자산운용은 올해 들어 수수료 인하를 여러 차례 단행했다. 두 기업이 ETF 시장 점유율 1·2위인 점을 고려하면 향유고래 사이의 싸움이 벌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삼성자산운용은 3월에 출시한 'KODEX 한국부동산리츠인프라' ETF 총 수수료를 0.09%로 내놨다. 비슷한 구조의 상품은 미래에셋자산운용 'TIGER 리츠부동산인프라' ETF 총 수수료가 0.29%인 점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됐다. 그러자 미래에셋자산운용은 TIGER 리츠부동산인프라 ETF의 총 수수료를 0.08%로 내리면서 맞대응에 나섰다.


4월에는 삼성자산운용이 미국 대표지수를 추종하는 ETF 4종의 운용보수를 연 0.05%에서 0.0099%로 인하하기도 했다. 다르게 말하면 위의 상품에 투자자가 ETF에 1억원을 투자한다 해도 전체 수수료는 9900원밖에 안 된다. 이는 국내 ETF 상품을 통틀어서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삼성자산운용이 사실상 수익 감소를 각오하고 수수료를 낮춘 것으로 볼 수 있다.


삼성자산운용과 미래에셋자산운용의 경쟁은 빠르게 성장 중인 국내 ETF 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싸움이다. 두 기업이라면 경쟁을 버틸 체급도 된다. 삼성자산운용의 ETF 운용자산은 5월 초 순자산총액 기준으로 55조7890억원, 미래에셋자산운용은 51조9220억원에 이른다. 3위인 KB자산운용이 10조9605억원인 점을 고려하면 압도적인 규모 차이가 난다.


문제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기 직전이라는 점이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자산운용사들은 ETF 수수료를 대형 운용사처럼 파격적으로 인하할 수가 없다. 그로 인해 줄어드는 수익 감소를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투자자는 더욱 낮은 수수료율을 찾아 대형 운용사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이 때문에 수익이 줄어들면 규모가 작은 자산운용사는 더더욱 수수료를 낮출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된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ETF 수수료 경쟁이 단기적 이득일 수 있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자산운용사들이 경쟁의 여파를 못 이겨 시장에서 발을 빼고 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고래 싸움을 벌이던 대형 자산운용사가 그때부터는 수수료를 올릴 수 있다. 또 투자자가 선택할 수 있는 ETF 상품의 폭이 좁아진다는 단점도 생긴다.


자산운용사의 수수료 경쟁을 억지로 막을 수는 없다. 어떤 경쟁이든 간에 '새우'보다 '고래'가 유리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위와 같은 가능성을 고려하면 투자자 입장에서는 불안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수수료 인하 외에 다른 무기는 없는 것일까. 특색 있는 상품이나 서비스 등의 효과 역시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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