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기업의 '한판승부' 지켜볼 줄도 알아야
'한진칼. 배터리소송' 섣부른 개입으로 김 빼는 정부
이 기사는 2021년 02월 04일 08시 22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 플러스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mbc 유튜브 캡처


[딜사이트 정혜인 기자] 3개월 전, 행동주의 펀드 KCGI와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펼친 '한판승부'가 국책은행의 개입으로 싱겁게 끝난 적이 있다.


2018년 11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오너 일가를 향한 KCGI의 공격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조 회장보다 지분율이 높아 KCGI 쪽으로 승기가 기울기도 했다. 하지만 산업은행이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의 합병을 추진하면서 판은 급격히 조원태 회장 쪽으로 기울었다. 산업은행은 두 항공사 합병을 위해 자금을 지원해 한진칼 지분 10%를 확보하기로 했다. 10%의 의결권은 단지 캐스팅보트일 뿐, 산업은행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중립적인 위치에서 양측을 조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업계는 이를 사실상 조원태 회장의 승리로 해석했다.


올해도 비슷한 일이 재연됐다. 정부 측에서 LG-SK '배터리 소송'의 김을 빼는 발언이 나왔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지난달 27일 한 토론회에서 "SK이노베이션(이하 SK)과 LG에너지솔루션(이하 LG)의 최고 책임자들에게 연락해 '낯부끄럽지 않냐, 국민들 걱정 끼치지 않게 빠르게 해결해달라'며 권유했다"고 밝혔다. 지난 2일에도 "너무 법적인 쟁송만 하지 말고 좀 빨리 해결했으면 한다"며 재촉했다.


싸움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 정부의 개입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뜻도 밝혔다. 우리나라 배터리 산업의 경쟁력이 뒤처질 우려가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들의 화해가 정말 시급한 문제인지 먼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려와 달리, 우리나라 배터리 업체들의 경쟁력은 소송 중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SNE리서치의 연간 글로벌 전기차용 배터리 사용량 자료에 따르면 LG에너지솔루션의 점유율은 2019년 10.5%(순위 3위)에서 2020년 23.5%(2위)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삼성SDI는 3.8%(5위)에서 5.4%(5위)로, SK이노베이션은 1.7%(10위)에서 5.4%(6위)로 올랐다.


정도가 지나친 싸움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영업비밀, 특허침해 소송으로 정정당당하게 법정 공방을 벌이고 있을 뿐이다. 사람이 다치거나 경제, 산업적으로 큰 위기를 불어올 만큼 손실을 가져온 적은 없다. 


오히려 최종판결로 '1차 승부'를 보는 게 빠른 길인 것으로 보인다. 유불리가 극명하게 나타날 경우 합의도 빨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내릴 수 있는 판결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ITC가 지난해 2월 증거인멸을 이유로 SK에 내린 '조기패소' 판결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LG 승소)과 조기 패소 판결을 뒤집고 수정(Remand, SK 승소)을 지시하는 경우다.


ITC가 LG의 손을 들어준다면, LG는 판결 내용을 토대로 SK에 정확하고 객관적인 피해금액을 요구할 수 있다. LG가 '최종판결 후 합의'를 추구하는 것도 이 이유다. 반대로 SK가 승소할 경우 판은 아예 뒤집힌다. 지금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LG와 협상에 나설 수 있고, 소송이 길어지더라도 공장 가동 중단 위험이 덜해져 부담도 줄어든다. 그 동안 따라붙었던 '영업비밀 침해 꼬리표'를 떼어내고 역공에 나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 수 있다.


현재 배터리 소송은 최종 판결을 약 일주일 앞두고 있다. 정부의 섣부른 개입은 선수들의 진짜 실력과 상관없이 유야무야 넘어가는 결과를 가져온다. 오히려 한 발 물러나 진정한 대가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을 기다리는 게 뒤끝을 남기지 않는 속시원한 끝맺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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