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 빼내기 전에
대기업 계열사 자금 조달 돕기 보다 본래 P-CBO 취지 되새겨야
이 기사는 2023년 12월 29일 08시 50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 플러스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신용보증기금 마스코트 '신용이' (출처=신용보증기금 홈페이지)


[딜사이트 이소영 기자]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자금조달 시장에서 인기가 좋았던 금융상품은 뭐였을까. 정답은 바로 신용보증기금(신보)이 보증하는 프라이머리 채권담보부증권(P-CBO)이다. P-CBO는 본래 신용등급이 낮아서 사채 발행에 어려움을 겪는 중소·중견기업들을 위해 마련된 제도다. 신보의 보증을 바탕으로 중소·중견기업은 유동화증권을 발행해 원활하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P-CBO 시장을 보면 당초 신보의 취지와는 다르게 P-CBO가 대기업 계열사들의 인기상품으로 바뀐 모양새다. 탄탄한 모회사의 지원을 놔두고 신보의 보증을 받아 자금을 조달하는 대기업 계열사가 늘어나고 있어서다. 그 중 대표적인 기업은 단연 SK가 꼽힌다. 지난해만 봐도 SK 계열사인 SK머티리얼즈가 P-CBO를 통해 발행한 금액은 900억원, SK렌터카가 500억원에 달했고, 이어 올해도 SK어드밴스드가 P-CBO로 500억원의 자금을 조달하는데 성공했다. 


눈길을 끄는 건 이들의 신용등급이다. P-CBO를 통해 자금을 조달 받는 대기업 계열사들의 신용등급을 보면 대체로 A급 신용도를 가졌다. 당초 P-CBO는 평균 신용등급이 BBB급 이하의 기업이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마련된 제도였던 만큼 시장에선 P-CBO의 본래 도입 취지가 달라졌다고 평가한다. 


과거 대기업 계열사들은 P-CBO의 장점을 인식했음에도 선뜻 이용하지 않았다. 자칫 자금난에 빠진 기업으로 낙인 찍힐까 두려워서다. 최근엔 그 기조가 달라졌다. 높은 금리로 회사채를 발행해 금융비용을 증가시키고 차입을 늘려야하는 악순환에 빠지느니, 신보의 신용보강으로 저렴하게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어려운 경제 상황 속 기업이 단단하게 생존하는 방안이라고 여겨서다.


문제는 대기업 계열사의 P-CBO 선호도는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신보가 지원 가능한 대출 한도는 분명하게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신용보증기금 관계자에 따르면 내년 신보가 P-CBO를 통해 지원 가능한 자금 규모는 2조5000억원이고, 이 중 대기업 계열사와 중소·중견기업에게 지원하는 자금 비중은 특별히 나눠져 있지 않다. 


이는 P-CBO를 이용하려는 대기업 계열사가 늘어나면 기존 중소·중견 기업이 조달할 수 있는 자금 파이는 보장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피자 한 판을 나눠 같이 나눠 먹는 셈이다.


신보는 "될 수 있으면 중소·중견 기업에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만 대기업 계열사를 지원할 계획"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명확한 규정 제시 없이는 대기업 계열사가 중소·중견기업보다 더 많은 파이의 자금을 조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는 노릇이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형국으로 치닫기 전에 신보는 P-CBO의 본래 취지를 면밀히 살펴 수정·보완 해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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