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자본시장 사각지대 놓인 'A등급 회사채'
AA급 쏠림 현상 심화…연초효과에도 '그들만의 리그'
이 기사는 2023년 01월 18일 10시 00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 플러스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딜사이트 백승룡 기자] 3조8700억원 vs. 0원. 지난 17일 회사채 수요예측을 진행한 LG화학과 효성화학이 각각 기관투자가들로부터 받은 매수주문의 결과다. 두 회사가 신용평가사로부터 받은 회사채 신용등급은 LG화학이 'AA+(안정적)', 효성화학이 'A(부정적)'다. 같은 날 수요예측을 진행한 두 회사의 엇갈린 희비는 신용등급에 따른 국내 회사채 시장의 양극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새해 들어 회사채 시장엔 유례없던 대규모 자금이 유입됐다. KT와 이마트가 수요예측 첫 주자로 나선 이후 연달아 조(兆) 단위 투자수요가 몰렸다. 지난 5일 포스코의 회사채 수요예측에선 3조9700억원에 달하는 매수주문이 몰리면서 수요예측제도가 2012년 도입된 이래 최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지난주까지 12개 기업이 수요예측에 나섰고, 2주간 총 20조6350억원의 매수자금이 쏟아졌다.


모두 신용등급 AA급 이상의 우량기업이 진행했다. 시장의 눈이 효성화학으로 쏠린 이유다. 효성화학은 올해 수요예측을 진행하는 첫 A등급 기업으로, 회사채 시장의 온기가 AA급을 넘어 A급으로 확산될지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었다. 효성화학은 희망금리밴드 상단을 개별민평금리 대비 +100bp(1bp=0.01%포인트)까지 높였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신용등급 A급 회사채는 AAA부터 BBB-까지 10단계로 이뤄진 투자등급 중 6~8번째(A+,A,A-)에 해당한다. LG디스플레이를 비롯해 SK실트론, 현대중공업, ㈜한화 등이 포진해 있다. 포스코건설·GS건설·롯데건설 등 건설사와 하이투자증권·SK증권·DB금융투자 등 중소형 증권사도 여기에 속한다. 통상 신용등급 AA급 이상의 우량채가 안전자산으로 여겨져 시장의 수요가 높은 반면, A등급 이하 회사채는 시장 여건이 조금만 불안정해도 외면받는다.


일찍이 LS전선(A+/안정적)과 CJ프레시웨이(A/안정적)는 이달 20일 돌아오는 각각 1100억원, 700억원 규모의 차입금을 보유 현금으로 상환하기로 결정한 상태다. 이들 기업도 회사채 발행을 염두에 두고 사전 태핑(수요조사)에 나섰지만, A급 회사채에 대한 냉랭한 분위기를 접하고 자금조달 계획을 접었기 때문이다.


사실 신용등급에 따른 투자수요 양극화는 수요예측제도 도입 당시부터 지적된 문제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록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지난해에도 신용등급별 수요예측 참여율은 A급(133.1%)이 AA급 이상(225.9%) 대비 1배수 가까이 낮았다. 이같은 우량채 선호 현상이 짙어지다 보니, 비우량 기업들은 애초에 공모시장 진입도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는 신용등급을 보유할 필요성도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내 신용평가사들이 신용등급을 보유한 기업 가운데 AA급 이상이 40%대에 달한다. 신용등급을 기반으로 한 직접금융시장이 '그들만의 리그'가 돼 가고 있는 셈이다.


정책적인 지원도 마뜩잖다. 현재 시장안정대책으로는 채권시장안정펀드(채안펀드)와 산업은행의 회사채 매입 프로그램, 신용보증기금의 프라이머리 채권담보부증권(P-CBO) 등이 운영되고 있다. 다만 산업은행의 매입 프로그램은 미매각을 고려한 조치라는 점에서, P-CBO도 자력으로 자금조달이 어렵다는 시그널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꼬리표가 붙는다. 채안펀드의 매입대상은 회사채의 경우 AA-등급 이상으로 한정돼 있다.


물론 기업의 원활한 자금조달을 위해 기관투자가들의 선택이 좌우되는 것은 시장의 이치와 맞지 않다. 그러나 회사채 시장이라는 큰 규모의 자금조달 시장이 일부 신용등급 상위기업을 위해 편향적으로 쏠리는 것도 직접금융시장의 다양성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국민연금을 필두로 한 연기금의 보수적인 채권투자 기조가 조금은 유연해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현재 연기금의 주식운용에 대해서는 펀드 전체의 수익률로 평가되지만, 채권운용에 있어서는 개별 채권의 평가손실까지 엄격한 잣대가 적용되곤 한다. 가령 국내 채권형 펀드도 전체 수익률을 기준으로 평가된다면 어떨까. 채권의 일정 비중은 우량채를 통한 안전자산으로 확보하면서, 일정 비중은 수익률을 추구하기 위해 A등급 이하 회사채 등으로 자금을 투입하게 되는 여력이 생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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