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채 수요예측 10년]
미매각 공포 기업들, 장기CP로 몰려
②장기CP, 수요예측 없이도 중장기 자금 조달…"시장훼손 우려"
이 기사는 2022년 12월 28일 16시 05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 플러스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딜사이트 백승룡 기자] 지난 10여년간 발행시장 성장에 기여해온 회사채 수요예측제도는 올해 '시장 교란자'를 맞닥뜨렸다. 수요예측을 거치지 않고도 1년 이상의 만기로 자금조달을 할 수 있는 장기 기업어음(CP)이 자본시장에서 급부상해서다. 올해 기업들이 장기CP를 통해 끌어모은 자금은 1조원을 넘어선다. 회사채 시장을 대체하면서 기업의 자금조달 시장에서 한 축을 형성해 가는 모양새다.


◆ 수요예측 없이도 중장기 자금 조달…회사채 시장 경색에 기업들 몰려


28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해 공기업·금융회사를 제외한 일반 기업이 발행한 장기CP 규모는 총 1조3400억원 규모로 집계된다. 이는 지난해(7500억원) 대비 80% 가까이 폭증한 수준이다. 올해 기준금리 인상이 거듭되면서 투자수요가 급감하자 미매각을 우려한 기업들이 회사채 시장을 떠나 수요예측 없는 장기CP 시장으로 발길을 돌린 영향이다. 공기업과 금융회사까지 포함하면 올해 장기CP 발행규모는 14조5700억원에 달한다.


CP는 본래 1년 이하의 단기자금 조달을 위한 것으로, 발행 시 증권신고서가 면제되고 수요예측도 거치지 않는다. 만기 1년 이상의 장기물로 발행할 경우 증권신고서가 의무화되지만 보호예수 1년 등 전매제한 조치를 취하면 이마저도 면제된다. 경제적 실질은 회사채와 유사하면서도 수요예측을 거치지 않는 일종의 '혼종'인 셈이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CP 발행액 가운데 만기 1년 이상인 장기CP의 비중은 지난 2019년 2% 미만이었지만, 올해 10%를 넘어섰다.


기업들이 그간 자금조달 과정에서 장기CP 대신 회사채를 택한 배경 중 하나는 자본시장 내 평판 관리를 위해서였다. 통상 장기CP는 수요예측을 통한 공모조달에 부담을 느끼는 기업들이 발행하다보니 장기CP를 발행하는 것 자체가 시장에 부정적인 시그널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 금리인상 여파로 회사채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현금 확보에 비상이 걸린 기업들은 장기CP를 모색하며 실리를 택하는 행보를 보였다.


특히 롯데그룹의 장기CP 행보가 두드러졌다. 롯데지주(2100억원)를 비롯해 롯데렌탈(2200억원), 롯데하이마트(1000억원) 등 롯데그룹 계열사들은 올해 총 5900억원 규모의 장기CP를 발행해 전체 발행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4%에 달했다. 회사채 시장에서 '빅 이슈어'(Big issuer)로 꼽히는 SK㈜도 창사 이래 최초로 지난달 2000억원 규모 장기CP를 발행, 달라진 조달 환경을 보여줬다. 금융사 가운데 삼성카드는 지난 5월 무려 10년 만기로 1000억원 규모 CP를 발행하기도 했다.


올해 일반기업의 장기CP 발행 현황(단위:억원).(자료=한국예탁결제원).

◆ 수요예측 거치지 않아 금리 왜곡…전문가들 "과도한 장기CP 확대 시장 훼손"


문제는 장기CP 시장이 확대될수록 장·단기 금융시장의 금리 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신용평가사들은 장기등급(회사채 등)과 단기등급(CP 등)으로 나눠 발행사 신용등급을 부여하는데, 장기CP 발행 땐 기업이 단기 신용등급을 토대로 장기자금을 조달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발행금리 결정 과정에서 수요예측을 거치지 않아 시장가치 반영 수준도 떨어진다. 그럼에도 발행사와 증권사 입장에서는 미매각 우려를 덜 수 있는 장기CP에 대한 유인이 높다.


안영복 나이스신용평가 기업평가본부장은 "장기CP의 대부분은 단기등급 중 가장 높은 A1 등급에서 발행되는데, 이는 장기등급으로 환산하면 AAA부터 A+까지 해당돼 실질적 상환가능성 측면에서는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장기CP의 확대는 신용평가·수요예측·시가평가 등으로 이어지는 국내 자본시장 규율수단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환경에서 상당한 규제차익을 얻고 있는 결과라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해외 사례를 보면 미국 등 주요국에서는 장기CP 발행이 허용돼 있지 않다. 미국은 증권거래위원회(SEC)의 '비조치의견서(no action letter)'에 근거해 적격 CP를 만기 270일(약 9개월) 이내로 제한하고 있고, 일본은 단기사채제도를 도입하면서 적격 CP를 만기 1년 이내로 정의한다. 유럽의 자본시장 관련 표준 규범으로 활용되는 국제자본시장협회(ICMA)의  'Primary Market Handbook'도 유럽 CP의 만기를 1일 이상, 1년 미만으로 규정하고 있다.


김필규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1년 이하의 만기 전자등록 방식으로 기업어음을 정의하는 등 만기를 규제하는 것은 기업어음 시장이 채권과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CP는 당사자 거래 위주의 거래가 이뤄지고 있고, 수요예측과 같은 주요한 발행절차를 도입하지 않는다"며 "장기CP의 과도한 확대는 신용채권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고 짚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장기CP 발행 확대는 올해 금리 상승에 따른 회사채 시장의 경색에 대응한 기업의 탄력적인 조달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면서도 "신용등급의 왜곡, 거래가격의 정교성 저하 등 문제점을 안고 있어 수요예측을 토대로 10여년간 구축해온 채권시장의 근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CP 시장은 단기자금 조달이라는 본연의 기능에 충실할 수 있도록 시장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개선이 나와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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