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딜사이트 이세연 기자]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신 재판부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사건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정말 긴 시간이 소요됐습니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이제는 피고인들이 본연의 업무에 전념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김유진 김앤장 변호사)"
부당합병·회계부정 혐의를 받았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변호인단은 항소심 선고가 끝난 3일 오후 3시10분께 서울고등법원 서관 앞에서 취재진을 만나 이같이 밝혔다. 판결 전후로 특별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던 이 회장을 대신해 심경을 밝힌 것이다.
이어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삼성물산 주주들의 피해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주주들에게 전할 말이 없는지' 등 취재진의 질문에는 "더 말씀드릴 사항이 없다"고 일관했다. '3월 주주총회에서 이 회장이 등기이사에 복귀할 예정인지', '해외 출장 등 경영 계획이 있는지'는 경영 활동과 관련한 질문에 대해서도 '변호인이 답변 드릴 만한 사안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서울고등법원 제13형사부는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 회장과 삼성 임원진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 과정에서 부정거래, 시세조종, 회계부정과 관련된 문제가 없다고 본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제일모직의 주가는 고평가된 반면, 삼성물산의 주가는 저평가됐다'고 인식할 만한 증거가 부족했다. 제일모직에 유리하게 보였던 1:0.35라는 합병 비율에 대해서도, 삼성이 회계법인 딜로이트안진의 합병비율 적정 검토보고서에 부당하게 개입해 나온 숫자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다.
재판의 주요 쟁점이었던 '삼성바이오로직스(삼바)의 부정회계 여부'와 관련해서도 "부정 회계 의도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당초 검찰 측은 2014년 삼바가 자회사인 에피스를 종속기업에서 관계기업으로 변경해 약 4조5000억원의 평가이익을 재무제표에 반영하여 자산을 과대 계상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회계상에서 종속기업이 관계기업으로 전환되면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지분 가치도 장부 가액에서 시장 가액으로 평가받게 되고, 지분법상 자산과 손익, 부채 등이 지분율만큼만 반영된다. 이에 삼바가 보유한 에피스의 지분 가치도 기존 2900억원에서 4조8000억원으로 급증한 바 있다.
문제의 핵심은 당초 삼바와 함께 에피스를 공동 설립한 바이오젠과의 합작 계약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삼바가 에피스를 관계기업으로 전환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재판부는 "바이오젠이 삼바와 함께 에피스를 '공동 지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검사 측이 주장하는 바이오젠의 동의권과 약정상 권리만으로 바이오젠의 지배력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재판부는 이날 업무상 배임, 외부감사법 위반 등 검찰이 공소 제기한 19개 혐의 모두를 무죄 선고했다. 이날 공판이 진행되는 내내 굳은 표정으로 일관하던 이 회장은 선고 직후 재판부가 법정을 떠나자 옅은 미소를 보였다.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장(부회장)과 입을 가리고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번 판결로 10여년째 이 회장의 경영 활동을 제약해 온 '사법리스크'가 사실상 해소됐다. 업계에서는 이 회장이 대내외적인 불확실성 속에서 조직문화 개편 등 당면 과제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일부터 집중해 근본적인 경쟁력을 찬찬히 높이겠다는 계획이다.
오일선 한국CXO 연구소장은 "이 회장의 등기이사 복귀는 상고 여부까지 확정된 후에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검찰이 여기서 종결하면 등기이사 복귀에 관한 논의 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과감한 투자 결정도 정치적인 상황과 대내외 경제 불확실성을 고려하면서 적절한 타이밍에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 연구소장은 "관세리스크, 딥시크의 등장 등 대내외적으로 급변하는 상황들이 존재하지만, 사실상 이 회장이 쉽사리 해결하기 힘든 요인인 만큼 현재로서는 조직의 내실을 다지며 조직문화를 새롭게 개편해나가는 데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며 "삼성전자의 저력이 예전처럼 강하지 않은 만큼, 이 회장이 리더십을 발휘해 조직에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업계 한 관계자는 "검찰이 상고하더라도 2심까지 무죄가 나온 만큼 판결이 갑작스럽게 뒤집히기는 쉽지 않아, 거의 구부능선은 넘었다고 볼 수 있다"며 "이제 이재용 회장이 더욱 광폭적인 행보를 펼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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