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이상균 IB부장]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우리나라 벤처투자 생태계는 전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곳이다. 시장 규모뿐만 아니라 벤처캐피탈(VC)과 벤처기업의 숫자와 이들의 활동성, 고용 창출 규모, 자금조달(펀딩)부터 시작해 투자, 투자금 회수(엑시트)로 이뤄지는 선순환 구조 등 여러모로 선진화된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보다 경제력에서는 한 수 위라는 일본조차도 최근 우리나라 벤처투자 시장의 시스템을 배우기 위해 전문가들을 보낼 정도다.
겉으로는 성장 가도를 달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지난해 국내 벤처투자 시장은 위기감이 감돌았다. 새로운 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벤처시장에 투자하는 정책자금 규모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최근 10년 이상 어느 정부가 들어서든 벤처투자는 단 한 번도 감액 없이 늘어왔지만 이 같은 기조가 최초로 바뀐 것이다.
한국벤처투자(모태펀드)와 성장금융을 비롯해 정책성 자금의 비중이 최소 30%가 넘는 국내 시장에서 정부의 태도 돌변은 시장에 큰 충격을 안겼다. 소액의 마중물로도 대기업보다 고용창출 효과가 크고 성장성이 높은 벤처시장이 최근 국내 경제성장의 상당부분을 책임졌다는 점에서 정책 실기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정도였다.
다행히 올해 들어 국내 벤처투자 시장은 바닥을 치고 반등하고 있다. 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올해 10월말 기준 신규 결성한 벤처조합의 약정금액은 4조7122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8% 증가했다. 같은 기간 모태펀드의 출자비중이 9.9%에서 21.7%로 급증하며 정책자금이 '큰 손' 역할을 해준 점이 결정적이었다. 올해 신규투자 역시 5조1424억원으로 전년동기 대비 24.8% 늘어났다.
다만 이 같은 시장의 반등은 아직까지도 소수의 대형 VC에만 집중되는 분위기다. 상당수 출자 사업은 트랙레코드가 검증된 VC의 독무대가 되고 있고 정량평가에서 밀리는 중소형 VC는 어딜 가도 찬밥신세다. 설사 운 좋게 출자를 받아도 위험가중자산(RWA) 도입으로 벤처출자를 줄이는 은행들의 철저한 외면으로 펀드 결성이 쉽지 않다. 기업형 벤처캐피탈(CVC) 설립 이후 타 기업들에게 벤처출자를 줄이고 있는 대기업의 달라진 태도도 영향을 미친다.
VC 증가세는 확연히 꺾인 지 오래다. 신규 VC 설립 숫자를 살펴보면 2020년 21개사, 2021년 38개사, 2022년 42개사에 이어 지난해에는 19개사, 올해는 9개사로 급감했다. VC 숫자는 올해 248개사로 여전히 역대 최대치를 유지 중이지만 현재 매물로 나왔거나 펀딩 실패로 사실상 투자업무를 접은 VC가 수십개에 달하는 게 현실이다. 내년에는 혹한기를 견디지 못한 VC 수십 곳이 문을 닫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중소벤처기업부는 여전히 글로벌 진출만을 강조하고 있다. 해외진출이 VC 입장에서는 중장기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는 하다. 중기부 장관이 외교부 출신이다 보니 해외진출에 매달리는 것도 어쩔 수 없기는 하다. 다만 현재의 시장 상황과 너무나 동떨어진 주문이라는 지적이 끊이질 않는다.
당장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판국에 관할 부처가 바다 건너 해외진출만 외치고 있으니 정책적 괴리가 상당한 게 현실이다. 현재 상황에서 해외진출을 꾀할 수 있는 VC를 한 손가락으로도 꼽을 수가 없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기업이 흥하고 망하는 것을 국가가 모두 제어할 수는 없다. 그래도 관할 부처라면 벤처투자 시장의 마중물 역할을 하는 VC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는 인식해야 한다. 중기부가 중소형 VC들의 절절한 얘기부터 들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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