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이승주 기자] "화려함을 멀리하고 실리를 취한다."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창업 정신인 '거화취실(去華就實)'의 의미다. 생전 신 명예회장은 해당 글귀를 쓴 액자를 집무실에 걸어놓고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는 1948년 껌 판매를 시작으로 현재 재계순위 6위로 거듭난 롯데그룹의 근간을 이루는 가치가 됐다. 롯데그룹의 거화취실 정신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대외적 악재를 큰 어려움 없이 넘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 시점 롯데그룹은 때 아닌 '위기설'에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달 16일 "롯데그룹이 유동성 위기로 모라토리엄(지급유예)를 선언하고 직원 50%를 감축할 것"이라는 지라시(정보지)가 퍼지면서 불씨를 키운 것이 원인이다. 이에 롯데그룹은 '사실무근'이라는 공시와 함께 총자산과 보유주식 가치, 부동산 가치, 즉시 활용 가능한 예금의 액수까지 공개하며 위기설을 불식하고자 노력했다.
사실 시장에서는 롯데그룹의 자산규모를 볼 때, 해당 지라시의 내용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한다. 다만 해명공시가 있기 전까지 계열사 주식들이 일제히 하락하고 내부 직원들 사이에서 불안감이 고조됐다는 사실은 롯데그룹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사례다. 특히 과거 롯데그룹이 무차입 경영을 유지하며 '탄탄함'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때와 비교하면 아쉬운 현실이다.
롯데그룹이 흔들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업의 양대 축인 '화학'과 '유통'의 부진으로부터 기인한다. 화학부문의 롯데케미칼은 중국의 치킨게임을 피해가지 못하고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탓에 최근 2조원이 넘는 14개 회사채에 기한이익상실(EOD) 사유가 발생했다. 롯데그룹은 채권단의 동의를 얻어 조건 유예(웨이버)를 확보하기 위해 신 명예회장의 숙원사업인 '롯데월드타워'까지 담보로 걸었다.
유통부문의 롯데쇼핑도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유통 시장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넘어가는 시기, 이에 발 맞추지 못하면서 수익성을 위해 스스로 외형까지 축소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이마롯쿠(이마트·롯데·쿠팡)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며 '유통 빅3'로 묶였던 롯데쇼핑(시가총액 약 1조6000억원)과 쿠팡(시가총액 430억 달러, 약 61조원)의 거리는 점차 벌어지고 있다.
결국 롯데그룹은 다시 한번 거화취실의 정신을 다잡아야 하는 상황이다. 내실을 다지면서 본업 경쟁력을 회복하는 것만이 롯데그룹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인 셈이다. 롯데그룹이 최근 기관투자자 대상 기업설명회(IR)에서 밝힌 자산재조정(리밸런싱)에 대한 시장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변화를 위한 첫 단추를 잘 뀄다는 평가도 나온다.
실패는 교훈 삼아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일각에선 신동빈 회장의 공격적인 차입 경영이 현재 상황을 야기했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다'는 이유로 지금까지의 성과를 무시할 순 없다. 방향성이 틀리지 않았다면 유연함을 발휘해 위기설을 돌파하는 롯데그룹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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