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유범종 차장] 한미약품그룹이 전문경영인 체제를 선언했다. 창립 이후 반세기가 넘게 굳건히 유지해온 오너십 경영의 종언이다. 그런데 이번 결정은 오너일가가 처음부터 강한 의지를 가지고 추진한 사안이 아니다. 오히려 천문학적인 상속세 부담이 시발점이 돼 등 떠밀린 영향이 크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창업주인 임성기 회장은 작고 당시 부인인 송영숙 그룹 회장과 세 자녀(임종윤·주현·종훈)에게 주식을 유산으로 남겼고 이들이 내야 할 상속세 규모는 무려 5300억원에 달했다. 송 회장과 딸인 임주현 사장은 연초 OCI그룹과의 통합으로 상속세 부담을 지우려 했지만 아들들이 크게 반발하면서 가족간 경영권 분쟁으로까지 격화됐다.
그 과정에서 그룹 지주회사인 한미사이언스 지분 12.4%를 보유하고 있던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이 돌연 캐스팅보트로 떠올랐다. 신 회장은 상속세 납부를 위해 현금 마련이 시급했던 송 회장과 임주현 사장의 보유지분을 추가로 사들이는 동시에 이들과 공동의결권 약정까지 맺으며 한미약품그룹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곧이어 그는 오너 경영을 철폐하고 대주주들은 이사회를 통해 전문경영인을 지원하는 형태의 지배구조를 새로 짰다. 결과적으로 상속세로부터 말미암은 경영권 분쟁이 오너일가를 밀려나게 한 셈이다.
이는 비단 한미약품그룹만의 얘기가 아니다. 국내 대표기업인 삼성도 이건희 회장 작고 이후 12조원에 달하는 상속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오너일가의 계열사 지분 매각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각자의 분야에서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밀폐용기업체 락앤락과 가구업체 한샘 역시 상속세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사모펀드에 경영권을 넘겨주기도 했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상속세 부담을 줄이기 위해 온갖 편법을 동원해 지배구조를 개편하고 오너일가가 주인인 계열사의 내부거래를 늘려 지배력을 키우고 있다.
기업 오너들이 이처럼 상속세 문제에 짓눌린 가장 큰 이유는 높은 세율 탓이다. 한국은 1950년부터 상속세 제도를 시행 중인데 현재 상속세율은 최고 50%(과세표준 30억원 이상)에 달하고 기업 최대주주에 붙은 할증까지 더하면 60%까지 뛴다. 가히 징벌적 수준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국가가 상속세를 부과하는 건 부의 재분배를 위함이다. 하지만 과도한 세율로 경쟁력 있는 기업들이 도태되거나 사라지는 역효과도 분명 간과해서는 안된다.
실제 가업 승계 이후 상속세를 마련하기 위해 오너의 경영권 약화 위험을 무릅쓰고 지분을 매각하면서 외부 투자자들의 먹잇감으로 노출되는 경우도 빈번한 현실이다. 나아가 기업의 지배구조 부실은 주가에도 악영향을 미쳐 소액주주들에게도 부정적인 여파를 끼칠 가능성이 크다. 학계 일각에서 과도한 상속세를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주식시장 저평가 현상)'의 주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다행은 최근 상속세율 경감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달 대통령실은 국내 상속세 최고세율을 50%에서 30% 안팎까지 낮추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밝혔다. 다만 이 역시 진보세력들의 반대가 커 법안이 통과되기까지는 지난한 시간과 진통이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현재 국내 기업들 가운데 100년 이상을 영위한 곳은 채 열 손가락에 꼽힌다. 이는 시대의 변화를 빠르게 따라가지 못한 기업의 전략적인 측면도 있지만 과도한 상속세 부담 역시 영속성을 저해하는 커다란 위험요인이다. 국가 경제가 굳건해지려면 기업들이 탄탄한 지배구조 속에서 지속적인 성장동력을 만들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라도 정부가 상속법 개편에 대한 강한 의지와 실행력을 보여주길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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