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신영욱 기자] 최근의 반도체 시장은 제품 개발 경쟁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이제 막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3E) 시장이 개화하는 단계인데, 벌써부터 다음 세대 제품 개발 시기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1월 진행한 2023년 4분기 컨퍼런스콜에서 HBM4의 양산을 오는 2026년 시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재 역시 개발을 진행하고 있는 SK하이닉스의 HBM4 양산 목표 시점은 2025년이다. 물론 신제품이 나온다고 해서 이전 세대 제품들이 폐기되지는 않는다. HBM3E 시장이 본격적으로 개화하기 시작한 지금도 HBM2와 HBM3 역시 현역 제품이다. 다만 최고 사양 제품에 대해 가장 앞서 나간다는 상징성이 갖는 의미는 크다. 예를 들어 현재 삼성전자의 HBM3E 납품에 다소 지연이 발생한 것만으로 SK하이닉스에 대한 시장 평가와 주목도가 급상승했다.
기업들이 제품 개발에 더욱 속도를 붙이는 데에는 핵심 공급처인 엔비디아의 영향이 적지 않다. 이 회사는 지난 3월 공개한 GPU '블랙웰'이 아직 시중에 나오지 않은 상태임에도 2026년 출시 예정인 차세대 GPU 루빈에 대한 내용을 공개했다. 특히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루빈 이후 GPU개발은 1년 단위로 진행될 것"이라며 "매년 새로운 제품에 대한 로드맵을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2년마다 내놓았던 신제품 개발 주기를 절반으로 단축했다.
반도체 기업들의 제품 개발 주기가 빨라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고 고객사 중 하나인 엔비디아의 신제품에 대한 납품 수요를 확보하기 위해선 제품 출시 주기를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컴퓨트익스프레스링크(CXL) , GDDR7 등 다른 차세대 제품들 역시 시장 개화가 임박하는 등 기술 경쟁의 중요도가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연구개발(R&D)의 중요성도 한층 더 부각된다. 보다 나은 성능은 물론 빨라진 고객사의 제품 출시 주기를 맞추기 위한 개발 속도도 확보해야 하는 만큼 R&D 역량을 더욱 끌어올릴 필요가 있어서다. 다행히 반도체 업황이 역대급 한파를 겪은 지난해에도 기업들의 R&D 열기는 식지 않았다. 이들은 비용절감 등을 진행하면서도 R&D 비용만큼은 크게 손을 대지 않았다. 특히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같이 누구나 알고 있는 대기업은 물론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들 역시 신규 장비와 기술 개발을 위한 R&D에 저마다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
다만 최근 반도체 시장은 기업의 노력만으로 충분한 경쟁력 확보를 장담하기 어렵다. 각 나라에서 정부 차원의 지원에 나서는 등 글로벌 반도체 경쟁의 국가전 양상이 심화되는 추세다. 미국은 생산 보조금과 연구개발 지원금으로 총 527억달러(약 73조원)를 투입할 계획이다. 일본 역시 자국 반도체 산업 부활을 위해 약 253억달러(약 35조원)의 지원금을 확보했다. 민간 투자까지 포함하면 반도체 산업에 총 642억달러(약 89조원)의 비용이 투입될 전망이다. 중국은 지난달 3440억위안(약 64조원) 규모의 사상 최대 반도체 투자기금을 조성했다. 지난 2015년 중국 정부가 발표한 하이테크 산업 육성책 '중국제조 2025'의 일환이다. 경쟁국들이 글로벌 반도체 주도권 확보에 얼마나 열을 올리고 있는지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봤을 때 우리나라는 '반도체 강국'이라는 타이틀이 다소 무색한 상황이다. 우여곡절을 겪은 'K-칩스법'은 21대 국회에서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최근 여당과 야당이 각각 관련 법안을 발의하긴 했으나 언제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다행인 점은 아직 돌이킬 수 없는 순간에 서 있지 않다는 것. '잘 나가는' 반도체 산업에 대한 지원이 다소 늦어지고 있긴 하나 아직 우리 기업들이 이 경쟁의 최선두권에 위치해 있으니 말이다. 기업들의 기술 개발 노력이 빛을 발할 수 있기 위한 국가적 지원이 더 늦어져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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