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일본 불매운동과 탈(脫)석탄
ESG, 선동적인 선언보다는 긴 호흡의 정교한 로드맵 필요
이 기사는 2023년 09월 15일 08시 54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 플러스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사진=딜사이트DB)


[딜사이트 백승룡 기자] 한때 일본 불매운동이 민족적 당위성으로 부각되던 때가 있었다. 아사히 맥주를 마시거나, 유니클로에서 옷을 사면 집단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일부 렉서스 차량에 대한 테러도 있었다. 회의적인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수십 년간 얽히고설킨 양국의 공급망 사슬 속에서 일부 소비재에 대한 불매운동으로 실질적인 '노재팬'이 될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쿠팡으로 국산 제품을 주문하면서 불매운동을 인증하는 이들도 있었다. 쿠팡의 최대주주는 일본 소프트뱅크그룹의 벤처캐피탈(VC) 자회사 비전펀드다.


민간석탄발전사 삼척블루파워가 올해도 회사채 시장에서 미매각 행진을 이어갔다. 총 2050억원 규모 공모채 발행을 위해 이달 7일 진행한 수요예측에서 투자수요는 240억원에 그친 것. 연기금을 비롯한 주요 금융기관의 ESG 기반 투자 기조로 인해 석탄발전에 비우호적인 환경이 지속된 영향이다. 상업가동 전까지 매년 회사채 발행을 통해 공사비를 조달하고 있는 삼척블루파워는 지난 2021년 6월 이래 단 한 번도 회사채를 완판시키지 못했다. 지역주민과 일부 환경단체의 반발로 인해 내달 예정된 상업가동 시점도 늦춰질 가능성이 크다.


친환경을 앞세워 ESG 흐름에 올라탄 이차전지 업계의 분위기는 상반된다. 눈부신 성장 전망에 힘입어 주식시장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이차전지 기업들은 올해 채권시장에서도 빠르게 주류로 자리 잡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 6월 첫 회사채 발행에 나서 단번에 1조원에 달하는 공모자금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고, 비우량등급을 가까스로 벗어난 에코프로도 지난 7월 '언더 금리' 발행으로 회사채 데뷔전을 마쳤다. 포스코퓨처엠은 지난 2월·4월에 이어 이달에도 회사채 발행을 앞두고 있어 올해만 세 차례에 걸쳐 공모자금을 끌어모을 전망이다.


ESG를 앞세운 기업과 역행하는 기업의 온도 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만 일본 불매운동처럼 어딘가 모순적인 측면이 있다. 이차전지 배터리가 탑재된 '친환경' 전기차는 무엇을 에너지원으로 삼나. 당연히 전기다. 그렇다면 전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나. 한국전력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말 기준 발전전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에너지원은 석탄(32.5%)이었다. 특히 국제유가 상승으로 에너지 가격이 치솟으면 값싼 에너지원인 석탄에 대한 의존도는 어김없이 높아진다. 적어도 현재 국내 시점에서는 이차전지·전기차가 석탄발전과 뗄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석탄금융을 앞다퉈 중단한 금융기관들도 일관성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탈석탄 외에는 뚜렷한 ESG 금융의 실체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 20~30년간 석탄과의 공존이 불가피한 상황에서도 다소 과감하게 탈석탄을 외친 것과 대비되는 행보다. ESG 채권에 대해서는 충분히 프리미엄을 제공하고 있나. 지난 2020~2021년께 우후죽순으로 쏟아졌던 일반 기업들의 ESG 채권은 지난해부터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기업은 비용에 반응한다. 거듭된 금리 인상으로 자금조달에 급급해진 상황 속에서 ESG 채권은 금리나 수요 측면에서 별다른 메리트를 주지 못한 것이다.


ESG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ESG가 요구하는 것은 올바른 방향성과 단계적 개선이지, 지금 당장 눈앞의 그럴듯한 성과를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다. 긴 호흡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를 마음만 급해서 보여주기 식으로 다가서면 디테일은 엉성하고, 일관성이 맞지 않아 모순에 빠지고 만다. 공교롭게도 노재팬과 금융권의 탈석탄 선언은 비슷한 시기에 이뤄졌다. 화끈하게 불타올랐던 일본 불매운동은 머지않아 사그라들었지만, ESG는 전세계적인 흐름이기에 그럴 수도 없다. 급진적이고 선동적인 선언보다는, 우리 산업구조에 맞는 체계적인 ESG 로드맵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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