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배상금 '구상권' 논란…청구 가능성은?
법리상 청구 가능하나 실익 불투명…국론 분열·정쟁 심화 '사회적 손실' 불가피
이 기사는 2023년 06월 23일 08시 53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 플러스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출처=엘리엇 매니지먼트)


[딜사이트 정호창 기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우리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에서 1300억원의 배상금 지불 판정이 내려진 것과 관련해, 일각에서 정부가 사건 책임자들에게 '구상권'을 청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귀추가 주목된다.


국민 세금으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됐으니 ISDS 제소의 원인을 제공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에게 배상액을 청구해 국고 손실을 메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관련 전문가들은 법리적으로 구상권 또는 손해배상 청구는 가능하나 배상금 회수가 쉽지 않은 등 실익이 적을 것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오히려 정치적 성향에 따른 국론 분열과 정쟁 심화 등으로 사회적 비용과 손실만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 야당·시민단체 "엘리엇 배상, 사건 책임자들이 부담해야"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중재판정부는 20일 우리 정부가 엘리엇에 배상금 5358만달러(약 690억원)와 지연이자, 법률비용을 지급하라 명했다. 배상액을 모두 합치면 우리 돈으로 1300억원 가량이다.


판정 결과가 전해지자 더불어민주당은 22일 '패소의 원인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당시 부당 개입한 책임자들에 있다'면서 '이들이 패소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시민단체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과 참여연대 등도 성명을 통해 '이 회장 등 삼성 총수 일가와 국민연금 등 합병 찬성을 주도했던 사건 책임자들에게 구상권을 청구할 것'을 촉구했다.


◆ 법조계 "법리상 청구 가능하나, 실익 적어"


이 같은 구상권 청구 주장에 대해 법조계에선 법리적으로 구상권의 청구는 가능하지만, 정부가 지출한 배상금의 회수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해 박 전 대통령과 이 회장의 뇌물 수수, 국민연금 압력 행사 등은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사안이므로 PCA 중재판정부의 판정문에 해당 내용이 귀책사유로 인정됐다면 법리적으론 정부가 국가배상법에 따른 구상권을 청구할 수 있을 것"으로 진단했다. 


다만 그는 "국가배상법은 공무원에게 적용되므로 박 전 대통령과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 등에게는 구상권 청구가 가능하나, 이재용 회장은 사인(私人)이므로 별도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구상권 청구가 가능하더라도 배상금 변제가 얼마나 가능할 지는 불투명하다. 해당 공무원의 고의 또는 중과실 비율 여부 등을 따져야 하는데 대통령 지시를 따른 문 장관 등 하급자에게 책임을 얼마나 물을지 정하기가 쉽지 않고, 관련자들에게 배상금 전액을 물릴 수도 없을 것이란 분석이다.


배상액을 책정하더라도 이들에게 변제 능력이 없다는 점도 문제다. 이미 모든 재산을 벌금과 추징금으로 잃은 박 전 대통령은 물론이고 문 장관 등이 수십~수백억 원의 배상금을 감당할 리 없다. 결국 정부가 구상권을 청구해봐야 얻을 실익이 거의 없단 의미다.


◆ 이재용, 변제 능력 있지만 '불법성' 인정 불가능··· 장기 소송전 불가피


사건 관계자 중 변제 능력이 갖춘 이는 이재용 회장이다. 하지만 현재 삼성물산 합병의 부당성을 놓고 검찰과 수년째 형사재판을 진행 중인 그가 배상금을 책임질 가능성은 작다. 스스로 합병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자충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법조계 전문가는 "정부가 손해배상을 청구할 경우 이 회장 성격상 도의적 책임을 지기 위해 변제에 응할 수도 있겠으나, 합병 책임이나 불법성을 인정하는 듯한 모습으로 비춰져 형사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어 가능성은 작은 편"이라며 "결국 긴 소송전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고 전망했다.


그는 "PCA 중재판정부가 박 전 대통령이나 이 회장에게 책임이 있단 판단을 내렸다고 해도 우리 법원이 이를 따라야 할 구속력은 없고, 민사재판의 손해배상 청구 입증은 형사재판과 다르기에 이 회장에게 엘리엇 배상금의 모든 책임을 물리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 법무부, ISDS 구상권 청구 전례 無··· 전 정부 대상 소송도 부담


구상권 청구는 법무부 입장에서도 매우 부담스러운 문제다. ISDS 관련 정부 배상금과 관련해 지금까지 구상권을 청구한 전례가 없어 형평성 문제가 불거질 수 있는 데다, 과거 정부의 수뇌부를 상대로 후임 정부가 구상권이나 소송을 제기하는 선례를 남기는 것에 대한 정치적 부담과 후폭풍이 큰 탓이다.


우리 정부는 지금까지 총 3번의 ISDS 배상금 지급 판정을 받았다. 이란 다야니 가문이 2015년 대우일렉트로닉스 매각 과정에서 한국 채권단의 잘못을 문제 삼아 제기한 사건에서 730억원, 미국 사모펀드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과 관련해 약 3000억원의 배상 책임을 안게 됐다.


특히 론스타 사건에선 우리 정부 관계자들의 책임 문제가 인정됐다. 하지만 당시 정부 관계자들에게도 구상권을 청구하진 않았다.


만약 이번 사건에서만 박 전 대통령이나 이 회장에게 구상권(손해배상)을 청구하게 된다면 형평성 문제가 대두될 수 있다. '공정'을 기치로 내건 이번 정부 입장에선 난감한 대목이다.


대통령을 포함한 과거 정부의 수뇌부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하는 선례를 남기는 것도 정치적 부담이 매우 큰 부분이다. 훗날 정권교체가 이뤄졌을 때 정치보복의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고, 이로 인해 잘못된 선례를 남겼다는 역사적 평가가 뒤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현 정부 뿐 아니라 정치색과 무관하게 어떤 정부라도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다.


◆ 실익 없이 국론 분열, 사회 갈등만 심화 우려


결국 법조계 전문가들의 중론은 법무부가 '구상권' 청구에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예상되는 실익보다 국론 분열과 사회적 갈등 심화 등의 부작용이 더 크게 나타날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대형 법무법인 관계자는 "외국 헤지펀드에 혈세를 지불하게 돼 국민들의 반감이 큰 것은 이해되나, 구상권이나 손해배상 청구로 얻게 될 변제액이나 실익은 기대보다 크지 않을 것"이라며 "오히려 정치 성향에 따라 여론이 갈리고 찬반 입장에 따른 사회적 갈등이나 정쟁만 심화돼 이를 해결하는데 드는 사회적 비용이 더 클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다른 법조계 관계자도 "변제 능력도 없는 전 대통령에게 구상권을 청구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며 "국고 손실은 피하지 못하고 괜히 민심의 분열만 키울 수 있으니 신중한 판단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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