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딜사이트 이슬이 기자] SK그룹이 사업재편을 위해 추진한 반도체 웨이퍼 제조사 SK실트론 매각이 시장으로부터 냉대를 얻는다. 유력 인수후보들이 잇달아 발을 빼자 입찰 일정이 연기됐고 매각지분이나 가격조정이 이뤄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23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SK실트론은 당초 이달 9일을 예비 기일로 정해 인수의향서(LOI) 접수를 받을 예정이었으나 일정을 일단 연기했다. 매각 대상은 SK가 보유한 지분 51%와 총수익스와프(TRS) 계약으로 묶인 지분 19.6%를 합친 SK실트론 지분 70.6%다. SK는 별도의 주관사 없이 직접 거래를 진행해 이달 말까지 숏리스트(적격예비인수자)를 추리겠다는 계획이었다.
소문난 잔치에 손님들이 발길을 돌리는 이유로는 일단 가격 문제가 지적된다. SK가 SK실트론의 기업가치로 기대하는 수준은 약 5조원이다. 부채를 제외한 거래 지분 인수가는 약 3조원대로 평가된다. 국내에서 조단위 거래를 성사할 인수 후보군인 대형 사모펀드(PEF) 운용사 상당수는 참여에 소극적인 분위기다. IMM프라이빗에쿼티(PE)와 스틱인베스트먼트 등은 유력 인수 후보로 이름을 올렸지만 두 곳 모두 내부적으로 이미 거래의사를 접은 상황이다. 이미 보유 중인 포트폴리오를 관리하기에도 벅찬 수준에서 수조원대 거래에 리스크를 투여할 여지가 없다는 이유다.
업계 한 관계자는 "유력 인수 후보로 거론된 하우스들 대부분 현재는 실무 검토는 거의 멈춘 상태"라며 "확고한 인수 의지가 있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국내 최대 운용사인 MBK파트너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롯데카드 매각과 홈플러스 회생절차 등 현재 진행 중인 사안에 운용역들의 역량이 모두 쏠려 있어 SK실트론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후문이다.
해외 GP하우스들도 비슷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매물은 훌륭하지만 반도체 관련사로 경기변동성에 취약하다는 점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SK실트론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300㎜(12인치) 실리콘 웨이퍼를 생산하는 업체이자 글로벌 시장 점유율도 3위권인 희귀매물이다. 반도체 시장 성장에 따라 성장여력이 충분하지만 반대로 산업구조 재편에 따라 실적이 급격히 꺾일 위험성도 내포한다. 지난해 말 회사는 매출 2조1268억원, 영업이익 3155억원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상각전영업이익(EBITDA)도 약 6400억원을 달성했다.
하지만 실트론은 SK가 지배권을 갖기 전 한때 부실기업으로 낙인됐던 기업이다. 보고펀드와 KTB프라이빗에퀴티가 2007년 동부그룹의 보유분 49%를 매입해 LG에 이어 2대 주주가 됐지만 이후 수년간 IPO(기업공개) 시도가 무산되고 적자가 누적되면서 끝내 채무불이행으로 채권단에 해당 지분이 압류당한 전적이 있다.
2017년 SK가 LG로부터 경영권 지분을 인수하고 이후 마이너 지분까지 최태원 회장 등이 사들여 지배주주가 된 이후에는 정상화됐다. 하지만 다시 독립기업이 될 경우 실적이 유지될 지는 미지수라는 지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찌감치 인수 의지를 접은 곳들이 최근까지도 유력 후보로 거론돼 온 배경에는 매도자 측의 분위기 조성이 영향을 미쳤다는 후문이다. 거래 초반부터 원매자 풀이 좁아 보이지 않게 일정 수준의 형식적 참여가 촉탁됐다는 전언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원매자가 예상보다 없어 주요 후보들이 참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입찰 전부터 나오는 게 SK 실무진으로서는 크게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며 "실제로 인수에 관심이 없어도 SK와 관계를 위해 인수 검토를 하는 척하는 하우스가 많다"고 지적했다.
SK는 경쟁입찰을 원하지만 현재 시장에선 한앤컴퍼니를 가장 유력한 후보로 거론한다. SK그룹과 잇단 거래로 관계를 쌓아온 데다 반도체 관련 포트폴리오와의 연계성도 뚜렷해서다. 한앤컴퍼니는 최근 몇 년 사이 SKC의 필름사업부(현 SK마이크로웍스), SK엔펄스의 파인세라믹 사업부(현 솔믹스)와 CMP패드 사업부 등을 연달아 인수하며 반도체 전공정 영역으로 보폭을 넓혀왔다. 실트론 매각 관련해서도 비교적 이른 시점부터 SK 측과 의견을 주고받아 온 것으로 알려졌다.
기대만큼 입찰에 참여하는 곳이 없는 상황이라 매도 측은 다양한 시나리오를 열어둘 가능성이 높다. SK가 기대하는 3조원대 인수가가 원매자들 입장에서 부담으로 작용하면서 가격조정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태원 회장 보유 지분(약 29%)도 거래 성사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추가 카드로 활용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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