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딜사이트 김호연 기자] 한국거래소가 중복상장 심사에 정성평가를 명문화하며 제도적 기준 마련에 나섰다. 중복상장 사례에 해당하는 기업이 마련한 기존 모회사 주주에 대한 보호 방안의 실효성을 거래소가 직접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중복상장 논란이 반복돼 온 상황에서 거래소가 심사 기준을 제도화하고 투자자 보호 의무를 기업에 분명히 요구하겠다는 방침을 처음으로 명시한 셈이다.
14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거래소는 최근 기업공개(IPO) 주관사들과 간담회를 열고 중복상장 심사 방향과 기준을 안내했다. 이는 지난 3일 유가증권시장·코스닥시장 상장규정 시행세칙 개정에 따른 후속 조치다.
개정된 시행세칙에 따르면 앞으로 상장예비심사를 청구하는 기업이 물적분할(영업양도·현물출자 포함) 방식으로 신설된 경우, 기존 모회사 주주 보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거래소는 모회사 차원에서 보호 조치가 충분했는 지를 정성적으로 판단하고, 미흡하다고 판단되면 주관사 등과 협의를 통해 보완 방안을 수립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이번 개정은 거래소가 처음으로 중복상장 여부 판단과 주주 보호 방안 심사의 근거를 명시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간 거래소는 물적분할 상장 추진 기업들에 일종의 '권고' 수준으로 보호 방안을 요구해 왔다. 하지만 이를 거절할 법적 근거도, 수용을 강제할 제도적 틀도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거래소는 특히 향후 물적분할 이후 상장을 추진하는 모든 기업을 심사 대상으로 삼겠다고 못 박았다. 기업이 제시한 주주 보호 조치가 거래소의 정성 평가에서 미흡하다고 판단되면, 상장 자체가 허가되지 않을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다만 거래소는 이번 조치가 일률적인 상장 제한으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했다. 거래소 관계자는 "중복상장 여부와 심사 기준이 모호하다는 시장의 우려에 따라 평가 기준을 구체화한 것"이라며 "물적분할 설립 법인이라 하더라도 모회사와 사업 연관성이 낮고 주주 권리 침해 우려가 없다고 판단되면 별도 보호 조치 협의 없이도 상장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이드라인 없이 시장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원칙은 유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장에서는 거래소의 재량권이 확대되면서 특히 대기업 계열사를 중심으로 물적분할 후 상장 추진이 과거보다 까다로워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업종 유사성과 자금 조달 목적, 지배구조와 이해관계 등 복합적인 평가 요소에 따라 주주 보호 수준이 달라질 수 있어서다. 거래소가 강도 높은 보호 방안을 요구할 경우 증시 상장을 통한 자금 조달 자체가 무산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 SK엔무브가 대표적이다. SK이노베이션의 윤활기유 자회사인 SK엔무브는 지난 4월 상장 예비심사 과정에서 거래소로부터 주주 보호 방안 보완 요구를 받았고, 두 달 만인 6월 상장을 철회했다. SK이노베이션 주주 보호 조치에 가용할 수 있는 여력이 크지 않은 상황에서 거래소와의 협의 과정이 원활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SK엔무브는 그룹 내 계열사인 SK E&S와의 합병을 추진 중이다.
LS그룹은 해외 자회사인 에식스솔루션즈 상장을 원하고 있다. 미리 투자받은 재무적 투자자 자금을 상환하기 위한 방편이다. 한화그룹은 오너 3세들이 직접 지분을 소유한 한화에너지 상장을 계획하고 있다. 이를 상장해 자금을 추가로 마련하고 회사는 지주사화 합병해 승계의 교두보를 만들 심산으로 해석된다. 업계 관계자는 "상장 대기업은 주주 수가 많고 이해관계도 복잡해 보호 조치 하나하나가 큰 비용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거래소가 제시하는 선례를 그대로 따라가기 어려운 기업도 적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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