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딜사이트 배지원 차장] "금융감독원 검사요? 걱정되는 부분도 있지만, 오히려 잘된 일이죠. 발행사 요구를 거절할 명분이 생겼으니까요."
최근 캡티브 영업 관행을 두고 금감원이 증권사들에 대한 현장검사에 나섰다. 수요예측에 계열사나 내부 부서를 동원해 참여하고, 수수료를 녹여 손실을 감수하며 물량을 유통시장에 내던지는 방식이 더는 묵과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그런데 이 강도 높은 검사에 대해 의외로 '잘됐다'는 반응이 업계 일부에서 나온다. 발행사가 과도한 캡티브 요구를 해올 때 이제는 "그건 제재 사유가 될 수 있다"며 정당하게 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캡티브 영업은 증권사가 리테일, 운용, 영업, FICC(채권·외환·상품) 등 내부 조직을 동원하거나, 보험사·자산운용사·캐피탈사 등 계열 금융사를 참여시켜 회사채 수요예측에 물량을 채우는 행위다. "주관을 맡겨주면, 낮은 금리에 일정 물량을 사주겠다"는 식의 조건부 영업이 최근 몇 년간 채권발행시장(DCM)에서는 관행처럼 자리잡았다.
하지만 이 왜곡된 구조의 출발점이 주관사 뿐 아니라 발행사이기도 했다는 점은 충분히 조명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증권사들이 불공정한 영업에 나서게 된 배경에는 발행사의 무리한 요구가 있다. 입찰제안서(RFP) 배부 단계부터 "특정 트랜치에 얼마를 참여하라", "유통시장에 내놓지 말고 만기까지 들고 가라", "직전 딜보다 더 낮은 금리를 맞춰달라"는 식의 지침이 붙는다. 이를 따르지 못하면 주관사에서 탈락하거나 물량을 축소당한다. 울며 겨자 먹기로 캡티브 물량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올해 1분기, 금감원이 본격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낸 시기에도 '이상 거래'는 여전했다. CJ ENM, LG화학, 현대엘리베이터, SK인천석유화학 등 주요 대기업 채권이 발행 직후 액면가(1만원)를 밑도는 가격에 유통됐다. 발행 당시보다 20~30bp(1bp=0.01%p) 높은 수익률로 거래된 것이다. 채권 가격이 하락한 만큼, 누군가는 손실을 감수하고 해당 물량을 시장에 던졌다는 의미다.
그 배경엔 발행사의 '캡티브 동원' 요구가 있다. 증권사는 계열사, 자기자본(PI), 크레딧채권운용부 등 다양한 내부 채널을 활용해 발행사 요청치를 맞춘다. 이후 물량을 유통시장에 내놓으며 손실을 본다. 이 손실은 IB본부의 수수료로 보전된다. 유통금리 왜곡은 보수적인 운용을 중시하는 연기금·공제회 등 '큰손' 투자자들의 이탈로 이어진다. 수요예측 제도와 발행시장 전반을 망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고작 수수료 '20bp'라는 주관사의 고혈을 짜내 '직전 발행보다 낮은 금리'를 확보하는 일은 정당하지 않다. 자금조달의 안정성과 신뢰 기반을 유지해야 할 발행사들은 그 텃밭을 스스로 망가뜨리고 있다. '시장질서'를 대가로 내어주고 얻어낸 성과는 아름답지 않다.
회사채 발행사들은 시장의 가격결정 기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기업이 해마다 수차례 문을 두드리는 이 시장은 주관사와 발행사, 투자자의 역할이 맞물려 돌아간다.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정정당당하게 임할 때, 비로소 기업의 조달도, 시장의 기능도 온전히 작동한다. 발행사부터 시장의 룰을 따르는 태도가 회사채시장 정상화의 첫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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