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정호창 부국장] # 청야전술은 전쟁시 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모두 없애 적군을 패퇴시키는 방어 전술이다. 수나라 침략에 대항한 고구려 을지문덕과 거란의 침입에 맞선 고려 현종이 펼쳐 살수대첩과 귀주대첩 승리의 밑거름이 된 전략이다.
글로벌 1위 비철금속 제련 기업인 고려아연은 오는 23일까지 자사주 20%를 목표로 공개매수를 진행한다. 회사가 17.5%, 연합을 맺은 베인캐피탈이 2.5%를 각각 매수하는 방식이다. 계획된 물량을 모두 사들일 경우 무려 3조6851억원이 투입되는 초대형 거래다. 고려아연의 부담 금액만 3조2245억원에 달한다.
이는 앞서 고려아연 주식 14.6%에 대한 공개매수를 선언한 ㈜영풍과 MBK파트너스 연합의 행보에 대항하기 위한 조치다. 상대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주식을 사들여 영풍·MBK 연합이 확보할 수 있는 주식수를 최대한 줄이겠단 전략이다. 자본시장판 '청야전술'인 셈이다.
문제는 이 전략의 위험성이다. 기본적으로 아군 진영의 재산을 없애는 방법이기에 전후 발생하는 후유증이 심각한 탓이다. 청야전술이 사용된 지역의 복구와 재건에 엄청난 비용이 소요돼 국력이 약화되고 민심 이반이 뒤따른다. 병자호란을 맞아 청야전술을 펼치며 남한산성에 고립됐다 패배한 인조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고려아연을 이끌고 있는 최윤범 회장 역시 리스크가 적지 않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기에 상대가 매입할 유통 주식수를 줄이는 효과 외에는 실익이 거의 없다. 계획대로 공개매수에 성공하더라도 경영권 방어에 완벽히 성공한단 보장은 없는 셈이다. 또한 자사주 매입에 조 단위 자금을 소모하면 튼실했던 회사 재무구조가 크게 약화돼 두고두고 최 회장의 발목을 잡을 공산이 크다.
특정인의 경영권 사수를 위해 천문학적 회사 자금을 동원해 자사주를 매입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사법적 논란은 물론이고, 주주총회에서 경영 책임과 도덕성 등에 대한 공세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당장 내년 정기주총 이사진 선임 경쟁에서 최 회장 측을 괴롭히는 약점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이번에 대규모 회사 자금을 소모하게 되면, 차후 영풍과 MBK 연합이 재공세에 나설 때 가용할 수 있는 방어 카드가 별로 없다는 점도 문제다. 백기사와 연합해 근소한 우위를 점하고 있으나 실제 최 회장 측이 보유한 고려아연 지분은 15%대로, 30%를 넘는 상대 진영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최 회장에겐 이 차이를 좁힐 자금력이 부족한 반면 상대에겐 지분 경쟁을 이어갈 능력이 충분하다.
이 때문에 자본시장 일각에선 영풍·MBK 연합이 공개매수가 인상 경쟁을 펼치며 최 회장과 고려아연의 실탄 소모를 유도한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최 회장이 아니라 영풍과 MBK가 오히려 '청야전술'을 구사해 상대의 향후 행보를 고립시킨 것일지 모른다는 추측이다.
현재로선 양측의 공개매수 결과를 예단하기 어렵다. 세금이란 변수가 있고, 자사주 매입과 관련한 법원 판결도 남아있다. 다만 둘 모두 기대보단 미흡한 결과를 얻을 것으로 보인다. 증시의 특성상 어느 쪽에도 주식을 넘기지 않고 추이를 지켜보며 주가 상승을 기대할 주주가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장기전으로 흐른다면 불리한 쪽은 어디일까. 당연히 곳간을 먼저 비운 쪽이다. 고려아연의 대항 공개매수에 대해 일각에서 '자충수'란 평가를 내놓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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