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이세정 기자] 파란색 번호판의 전기차들이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충전기 설치 의무화에 따라 마련된 지정석은 며칠째 비어있는 경우도 있다. 아마 빠르게 번지고 있는 '전기차 포비아'(공포증) 때문일테다.
발단은 이달 1일 인천 청라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주차돼 있던 벤츠 전기차 EQE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다. 해당 화재로 당시 주차돼 있던 약 140여대의 차량이 불에 타거나 그을렸고, 이에 따른 피해 금액은 최소 100억원으로 추산된다.
전기차 화재 사고는 그동안 종종 발생해 왔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다르다. 도로 위를 달리는 전기차 대수가 늘면서 자연스럽게 소비자가 몸으로 느끼는 사고 발생률도 증가해서다. 실제로 정부가 파악한 국내 전기차 누적 등록 대수는 올 상반기까지 60만6610대 수준이었다. 공식적으로 전기차 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2017년 2만5108대와 비교하면 약 7년 만에 24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이에 따라 전기차 화재 건수도 2017년 1건에서 2020년 11건, 지난해 72건으로 급증하고 있다.
여기서 드는 생각은 정말 전기차와 그 차주가 악당이 맞느냐는 점이다. 차주 입장에서 생각하면 억울한 점이 한두개가 아니다. 정부가 앞장서 친환경차 보급 확대를 위해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제공하고 전용 번호판을 달아줄 정도로 우대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죄인 취급을 하니 말이다. 전기차 관련 대책과 규제를 제대로 준비해 놓지도 않고 구매를 부추긴 것 아니냐는 토로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안타까운 부분은 전기차를 향한 혐오가 실질적인 폭력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기차를 잠재적 화재 요인의 범주로 분류하면서 지상 주차를 권고하거나, 전기차의 주차장 출입을 금지하는 곳이 늘고 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자신을 전기차 차주라고 밝힌 작성자는 "전기차 사이드 미러가 파손됐다. 전기차를 콕 찍은 것인지 홧김에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안타깝다"는 심경을 적기도 했다.
국민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해결법은 보이지 않는다. 정부는 부랴부랴 전기차 충전율 제한과 배터리 검사 강화 등 몇 가지 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탁상행정이라는 비판만 커질 뿐이다. 예컨대 전기차 완충량이 출고 당시부터 95%로 설정된 상황인데, 90%로 다시 제한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본질을 빗겨가는 논쟁도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화재 차량에 탑재된 배터리가 중국산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자동차 브랜드들은 앞다퉈 자사 전기차의 배터리 제조사를 공개하고 나섰다. 하지만 청라 화재의 경우 스프링클러 미작동이 대규모 화재의 원흉이다. 최근 포르투칼 리스본에서는 테슬라에서 발생한 불로 인근에 주차된 200여대가 파손됐다. 해당 브랜드는 중국산 뿐 아니라 국산과 일본산 등 다양한 국적의 배터리를 혼용 중인 데다, 화재 차량에 장착된 배터리의 제조국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가 내달 초 발표하는 전기차 화재 예방 및 대응 관련 종합대책에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전기차는 잠시 캐즘(대중화 전 일시적 수요 둔화)에 빠졌지만,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대중화가 될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정부가 적극적이고 실효성 있는 대책을 내놔야 하는 이유다.
배터리관리시스템(BMS) 정보 제공 의무화를 비롯해 배터리 내부 결함으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더라도 외부 확산을 원천 차단하는 전용 필름 부착 등도 고려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안 그래도 고가인 전기차의 출고가가 더 비싸지겠지만, 소비자들은 돈을 조금 더 내서라도 안전을 택할 것이다.
물론 여러 업계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보니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도, 특정 업계의 부담을 키우는 규제 도입도 쉽지 않다. 그렇지만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 단순하게는 국내 전기차 시장의 도태지만, 멀리 보면 글로벌 시장에서의 낙오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주차장을 떠난 전기차는 언제쯤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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