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벨리온-사피온 합병파두 사태 역풍…유동성 고갈 우려에 '빅딜'
[딜사이트 이상균 기자] 리벨리온과 사피온의 갑작스러운 합병 추진은 글로벌 AI반도체 시장에서 승기를 잡겠다는 사업적인 측면도 고려했지만 이에 못지않게 이들 회사의 유동성 고갈 우려도 한 몫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 파두 사태로 반도체 기업의 기업공개(IPO)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제기되면서 이를 타개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합병 카드를 꺼내들었다는 지적이다.
◆"꾸준한 자금조달 없으면 언제든 유동성 위기"
리벨리온은 올해 2월 마무리한 시리즈B 라운드를 통해 약 650억원 규모의 투자를 받았다. 누적 투자금액이 2770억원에 달하지만 시리즈B를 마무리한지 채 반년도 되지 않아 기업공개(IPO)를 위한 상장주관사 선정에 나섰다. 자금조달이 그만큼 시급했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사피온도 상황은 비슷하다. 올해 5월부터 2000억원 규모의 시리즈B 투자유치에 나섰지만 예상과 달리 투자자들의 반응은 미지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벤처캐피탈(VC) 관계자는 "AI 반도체는 연구개발에만 천문한적인 비용을 투입해야 하는 업종"이라며 "수백억원의 자금을 유치해도 이를 모두 소진하는데 1년이 채 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리벨리온과 사피온이 갑작스럽게 합병을 추진한 것은 양사의 자금조달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합병을 통해 돌파구를 찾겠다는 필요성이 대두된 것으로 보인다"며 "합병을 통해 중복사업부를 없애고 사업을 효율화시키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리벨리온은 개발비용에 매년 수백억원을 쏟아 부으면서 대규모 손실을 보고 있다. 지난해 판관비(172억원)에 포함되는 경상연구개발비만 136억원으로 매출(27억원)의 5배에 달한다. 주력 제품의 개발이 진행 중인 탓에 아직 매출 규모가 작아 지난해 영업손실 158억원, 당기순손실 136억원을 기록했다.
현금흐름도 좋지 못하다. 지난해 영업활동 현금흐름은 -246억원에 그쳤다. 현금이 들어오기는커녕 빠져나갔다는 얘기다. 이처럼 극악의 현금흐름에도 회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수차례 실시한 유상증자로 지난해 재무활동 현금흐름이 605억원을 기록한 덕분이다. 지난해 12월말 기준 현금및현금성자산은 690억원, 단기금융상품(전액 은행예금)은 465억원 등 총 1155억원을 보유하고 있다.
PE업계 관계자는 "리벨리온 같은 팹리스 기업들은 연구개발 및 인건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곤 한다"며 "아직까지 현금 유동성은 괜찮아 보이긴 하지만 꾸준한 자금조달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유동성 위기에 휘말릴 수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시장, 실적 나오기까지 장기간 소요
업계에서는 국내 AI 반도체 시장에서 선두주자로 인정받는 리벨리온과 사피온조차 자금조달이 녹록치 않다는 점에 대해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시장은 엔비디아와 TSMC, 인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거대 산맥이 존재한다"며 "이들 기업을 뛰어넘는다는 게 굉장히 어렵고 범용칩 개발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며 투자 이후 실적이 나오기까지 장기간이 소요된다는 점은 투자를 꺼리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최근 파두 사태도 리벨리온과 사피온의 합병 추진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VC 관계자는 "파두 사태로 반도체 기업의 IPO가 향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며 "이런 상황에서 국가 전략 산업인 반도체 활성화를 위해 대표 기업 두 곳이 합병을 결정한다는 것은 나중에 IPO를 추진할 때도 거래소를 압박할 수 있는 굉장히 좋은 명분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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