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이호정 산업1부장] "한국 기업인 쿠팡은 다른 나라와는 다른 비즈니스 및 문화 환경에서 운영되고 있다. 한국의 다양한 규제와 관련법 때문에 자사가 주주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행동을 할 수도 있고, 재무적으로 악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쿠팡이 뉴욕증권거래소 상장 신고서에 명시했던 문구다. 당시 업계의 한 관계자는 "미국의 경우 상장 심사 요건은 국내보다 덜 까다롭지만 기업의 컴플라인언스를 강조하고, 이를 어길 경우 경영진에 대한 형사처벌 및 징벌적 손해배상을 묻는 집단소송 등을 고려해 해당 문구를 넣게 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는 그의 설명이 '한국에서 기업하기 힘들다'는 말로 들렸다.
2년도 지난 쿠팡 얘기를 불현듯 꺼내든 건 최근 화제가 된 부산 깡통시장 사진 때문이다. 지난 6일 공개된 해당 사진에는 윤석열 대통령과 국내 주요그룹 총수들이 떡볶이를 사이좋게 나눠먹으며 웃고 있는 모습이 담겼다. 패러디가 될 만큼 재계 총수들의 익살스런 모습이 여럿 찍혔지만 마냥 즐거워 보이지는 않는다. 불안정한 국내외 정세로 경영리스크 헷지를 위한 해법 찾기도 부족한 시간에 병풍으로 끌려나온 모습에 애잔함마저 든다.
실제 이재용 회장이 이끌고 있는 삼성전자의 경우 반도체 시황 악화로 올 3분기까지 영업을 통해 벌어들인 현금이 전년 동기 대비 44.5% 감소한 24조1922억원에 그쳤다. 문제는 삼성전자가 이 정도의 현금흐름이라도 유지할 수 있었던 게 반도체 감산에 따른 기저효과 덕분이었단 점이다. 4분기 들어 D램을 중심으로 반도체 수요가 살아나고 있으나 예년 수준으로 생산량을 늘리면 가격 폭락으로 언제든 손실이 날 수 있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상황이다.
이 회장 외 윤 대통령과 함께 깡통시장을 방문한 ▲구광모 LG 회장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정기선 HD현대 부회장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 등이 맡고 있는 기업 상황도 삼성전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 큰 틀에서 LG와 SK는 전기차 수요 감소에 따른 2차전지 사업효율화 작업이 시급한 상태고 ▲한진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합병 문제 ▲HD현대는 인력난 ▲한화와 효성은 국제유가 급락에 따른 래깅(원재료 투입 시차) 효과를 최소화할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시점이다.
이처럼 눈앞에 놓인 현안만 해도 한가득인 재계 총수들은 떡볶이를 먹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한국에서 기업하기 힘들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총수들은 부산에 '2030 세계엑스포'를 유치하기 위해 민관합동조직을 구성한 2022년 7월부터 개최지 발표가 이뤄진 지난달까지 17개월간 막대한 재원 지원과 함께 윤 대통령의 해외순방까지 따라나서야 했다. 뒷걸음질 친 본업의 경쟁력 제고도 시급한데 민심 달래기까지 동원됐으니 그 속내가 꽤나 복잡했겠다.
특히 이재용 회장은 자괴감이 들지 않았을까.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부당 합병·회계 부정 혐의로 2021년 4월부터 지난달 17일까지 총 106회 열린 공판에서 대통령 해외순방 동행,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면담 등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96번이나 출석했다. 공익적 차원에서 수시로 국가적 대사에 동원되면서도 매달 2~3회씩 법원에 출석했으니 그의 입에서 '못해먹겠다'는 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최근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가 국내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2024년 국내 투자계획 조사'에 따르면 미정(49.7%) 혹은 없다(5.3%)고 응답한 비율이 55%에 달했다. 해당 조사에 참여한 곳이 131개에 불과했던 것을 고려하면 내년도 국내 기업들의 투자 기조를 일반화하긴 어렵지만 올해만큼이나 녹록치 않은 한 해가 될 전망이다.
분초를 쪼개 사업을 구상해야 할 재계 총수들을 대통령 행사를 위해 병풍으로 세우는 건 국가적 경제손실이다. 기업인은 이윤을 극대화 해 기업을 성장시켜 좋은 일자리를 만들고, 착실한 세금 납부를 통해 국가 경제발전에 이바지하는 게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아쉬울 때만 기업을 찾는 정부와 정치권의 행태가 바뀌어야 '한국에서 기업하기 힘들다'는 얘기가 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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