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박민규 기자] 수많은 첨탑과 탱크, 파이프라인으로 이뤄진 거대한 철제(鐵製) 우림. 해무에 가려졌어도 위압감이 현현하다. 작은 키도 아니건만 발끝을 올리고 고개를 한껏 쳐들어도 끝이 보이질 않는다. 고요하단 점에서 압도감을 더한다. 이렇게 생산 시설이 많으면 요란할 법도 한데 느껴지는 것은 작게 웅웅대는 소리와 미약한 진동 뿐, 인적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 25일 울산역에서 차로 30여 분을 달려 도착한 SK 울산 콤플렉스(이하 울산 CLX)의 첫인상은 하나의 '유기체'였다. 아직은 사람의 손을 타는 공장의 풍경이 익숙한데, 이곳은 60년의 세월과 250만여평의 규모가 무색하도록 사람 없이도 모든 게 일사불란했다.
SK CLX는 SK이노베이션을 비롯해 SK에너지∙SK엔무브∙SK엔텀∙SK지오센트릭 등 핵심 계열사의 마더 플랜트들이 포진한 생산 단지로, '산업 수도'로 일컬어지는 울산에서도 60년 이상 맹주 노릇을 해 온 터줏대감이다. 1962년에 설립돼 1964년부터 상업 가동을 시작한 국내 최초의 정유 공장이니, 우리나라 정유 산업의 역사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나일론'으로 불리는 합성 섬유 등 다수 석유 및 화학 제품 생산이 처음 시작된 곳으로, 각종 '최초'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는 중질유 공장 등 고도화 설비에 저황 선박유 제조 시설들까지 들어서면서, 생산 능력과 규모 모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정유 공장이 됐다. 정유 공장만 5개로, 하루 약 84만5000배럴의 원유를 처리한다. 이는 우리나라의 석유 제품 사용량 40%에 달하는 물량이다.
부지만 여의도의 2.5배 크기인 약 250만평으로, 차량으로 1시간을 돌아도 3분의 1이나 둘러볼 수 있을까 말까 한 규모다. 이렇게까지 확장된 이유는 저장 탱크를 포함해 접안 시설 등도 증설됐기 때문이다.
곳곳엔 콜로세움을 연상케 하는 시설들이 늘어져 있었다. 약 50개국에서 수입해 온 원유를 비축하거나 석유 혹은 화학 완제품을 저장하는 탱크다. 원유 저장 탱크의 경우 높이만 23m에 달하며, SK CLX엔 총 34개로 있다. 2000만배럴을 저장할 수 있는 규모로, 이는 최근 거래일인 이달 28일 기준 두바이유 가격(배럴당 73.45달러)으로 환산하면 1조9000억원 이상의 가치다.
저장해 둔 원유는 일단 꼭대기에서 연기가 나부끼는 탑을 거쳐야 한다. 끓는점 차이를 이용해 원유를 휘발유∙중유∙액화석유가스(LPG)∙등유∙경유 등으로 나눠 뽑는 증류탑으로, 일명 '타워'로 불린다. 이후 파이프라인을 통해 각 공장으로 운반, 성분 배합에 따라 다양한 석유 제품으로 탄생해 전국 각지를 누빈다. 이전에는 육로나 바닷길을 지나야 하므로 운송비가 꽤 들었지만, 지금은 지하 송유관을 통해 이틀 정도면 수도권에 도달할 수 있어 국내 운임 부담이 거의 거의 없단 설명이다. 석유화학 제품 경우 대부분 인근 화학사로 납품된다.
산단을 구비구비 지나 바다 냄새가 훅 끼쳐올 때쯤 압도적인 규모의 자체 부두도 만날 수 있었다. SK CLX는 2만톤 규모의 소형 선박이 접안하는 내항 부두, 17만톤 규모 대형 선박 23척이 동시 접안 가능한 외항 부두를 갖추고 있다. 원재료인 원유를 수입하고 수출 효자 상품인 석유 제품을 수출하기도 하는 곳으로, 말하자면 정유 사업의 시작과 끝이 맞물리는 지점이다. 해무가 자욱해 가동 모습을 제대로 볼 순 없었지만, 육지로부터 4km 정도 떨어진 해상에 떠 있는 하역 시설인 부이(Buy)에 선박이 정박하면 해저 배관을 통해 원유나 석유를 흘려보내는 식이다.
울산 CLX의 혈관격인 파이프라인은 총 길이가 약 60만km로, 지구와 달 사이 거리의 절반에 달하는 규모다. 눈길을 끄는 부분은 이렇게 큰 규모의 산단에서, 특히 생산 현장에 돌아다니는 직원을 좀처럼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SK CLX 임직원은 총 3000명이며, 이 중 약 1500명이 4조 2교대로 현장에서 근무하니 동시 작업하는 근로자 수는 700명에 불과한 셈이다. 일찌감치 자동화를 실현한 덕분이다.
SK이노베이션은 인공지능(AI)과 디지털 전환(DX) 기술을 활용한 생산 효율성 및 공정 안정성 제고에 역점을 기울이고 있다. 60년 이상 정유 및 화학 산업 현장에서 축적해 온 운영 기술과 노하우에 AI, DX를 접목한 설루션 'OCEAN-H(Optimized & Connected Enterprise Asset Network Hub)'를 국내 최초로 자체 개발한 데 이어 새로운 먹거리로 확장 중이다. 2016년부터 추진해 온 울산 CLX '스마트플랜트'화 작업은 AI와 DX 적용으로 '스마트플랜트 2.0' 시대를 맞았다.
정창훈 SK에너지 스마트플랜트추진 팀장은 "통상 제조 시설은 자동화 관점에서 '스마트팩토리'를 추구하지만, 우리는 이미 제품 운반 과정 대부분을 자동화했기에 이제 어떻게 지능화할 것인가의 관점에서 스마트플랜트를 지향하고 있다"며 "SK그룹의 DX 강화 기조 속에서 SK이노베이션은 자체적으로 AI를 구현 가능한 인력을 꾸려 약 40개 과제를 수행했고, 이 가운데 10개는 자체 개발했다"고 말했다.
DX 설루션은 해외에서 도입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일하는 방식과 문화가 반영돼야 하는 만큼 활용성이나 확장성에서 괴리가 커, 들여와 놓고도 폐기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에 SK이노베이션은 직접 입맛에 맞는 AI, DX 설루션 구축에 나선 것이다. 여기에는 타 업체와 달리 60년 이상 보존해 온 빅데이터가 큰 자산이 됐다. 경험이 내재화된 DX 설루션은 현재 업계에서 가장 앞선 공정 지능화 사례로 평가된다. 당초 목적은 내부 시스템 고도화였지만, 정유∙화학 업종에 특화된 설루션으로 입소문이 나며 이수스페셜티케미컬 등 타 업체의 러브콜이 이어지는 등 일부 사업화까지 이뤘다.
실제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초 OCEAN-H 상업화 후 해외 설루션과 경쟁하며 현재까지 울산 지역 정유∙화학 업체 5개사를 고객으로 확보, 약 35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OCEAN-H의 해외 진출 초기 단계도 밟고 있다. 작년 11월 인도 글로벌 정보 기술(IT) 서비스 및 소프트웨어 기업 TATA그룹의 TCS(TATA Consultancy Service)와 업무 협약(MOU)을 체결했으며 최근 쿠웨이트∙인도네시아∙베트남 기업들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전언이다. 이와 함께 발전∙배터리∙철강 등 분야에서도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OCEAN-H를 지속 지능화, 고도화할 방침이다. 스마트 작업 허가서(Smart Work Permit), 스마트 비계 시스템 등으로 자체 개발 제품군과 AI 기술 적용을 확대하고 있다. DX 설루션 개발에 그치지 않고 사업화까지 도모하는 이유 역시 설루션 자체의 고도화에 있다. 데이터가 모일수록 더욱 정교한 설루션을 만들 수 있어서다.
이날 SK이노베이션 한 관계자는 정년 퇴직을 앞두고 진행하는 마지막 프레스 투어에서도 회사와 업(業)에 대한 자부심을 가득 드러냈다. 울산 CLX의 역사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산증인 중 하나다. 그는 울산 CLX의 DX 또한 지역 사회의 신뢰와 사랑에 보답하고자 하는 길임을 역설했다. 사고 발생률을 낮추기도 하지만, 딥아이 등 지역 기업과 협업해 울산 AI 및 DX 생태계를 키우는 효과도 기대된다는 점에서다. 아울러 "(중국의 신증설에 따른 공급 과잉으로) 한국 석유화학 산산업은 지고 있지만, 정유 경쟁력은 여전히 높다"며, 산업 자체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응원을 부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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