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범찬희 기자] 인류의 당면 과제인 기후변화의 해결책으로 여겨졌던 전기차가 한 순간에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고 있다. 신기술의 총아로 각광받다온 전기차가 내 가족의 생명과 재산을 앗아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여겨지고 있다. '제2의 벤츠 청라 화재'를 막겠다는 명분 아래 지하주차장에서 문적박대를 당하고 있다.

전기차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 것은 비단 국내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친(親)전기차 성향이 강한 중국의 한 호텔에서는 화재 위험을 이유로 지하주차장에 내연기관 차량만 입장이 가능하도록 했다는 외신발 보도가 전해졌다.

글로벌 완성차 시장의 격전지인 미국에서는 차기 대통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Kamala Harris) 부통령이 전기차 의무화 지지를 철회했다. 영국에서는 2030년까지 내연기관 자동차 판매를 금지한다는 정책을 5년 연기했다. 국내의 경우처럼 포비아(공포증)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전기차 캐즘이 세계적 추세임을 읽을 수 있다. 전기차가 외면을 받는 사이 친환경 모빌리티의 대세는 하이브리드(HEV)로 기울었다.

일련의 사태를 예견이라도 한 걸까. 지금까지 돌아가는 상황만 놓고 보면 도요타 아키오(豊田章男) 도요타(TOYOTA) 회장의 '전기차 시기상조론'이 적중하는 듯하다. 도요타 회장은 자동차 산업 리더 중에서 몇 안 되는 전기차 회의론자로, 글로벌 모빌리티 시장에서 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많아야 30% 정도에 불과할 것으로 내다봤다.

도요타 가문 4세인 그의 지론은 실제 경영에 녹아들어 도요타가 글로벌 1위 완성차 지위를 이어가는 원동력이 됐다. 도요타는 전기차 보다는 하이브리드 분야에서 독자적 기술을 확보하는 데 집중했고, 이를 토대로 2020년 이후 5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자동차를 판매하고 있다.

어쩌면 전기차 시기상조론은 도요타 회장의 개인적 희망사항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도요타가 세계에서 양산형 하이브리드 자동차(1997년 프리우스)를 처음 선보인 원조인 만큼 전기차 보다는 하이브리드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랐을 터.

하지만 어지간한 확신으로는 시류를 거스르는 결단을 내리기 힘든 만큼 심사숙고 끝에 내놓은 견해로 보는 게 타당하다. 까딱하다가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매한 경영인이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어서다. 나아가 선대 회장들이 87년에 걸쳐 쌓은 도요타의 위상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다.

도요타 회장이 위험을 무릅쓰고 마이웨이를 걸을 수 있을 수 있었던 자신감의 원천은 무엇일까. 아마도 누가 보다 자동차를 사랑한다는 자부심이 용기의 원천이 아닐까 싶다. 도요타 회장은 글로벌 완성차 집안에서 태어난 '슈퍼 금수저'이기 전에 레이싱을 즐기는 자동차 마니아로 유명하다. 어느덧 고희(古稀‧1956년생)를 앞두고 있는 도요타 회장은 지금도 자신이 창설한 레이싱팀인 가주레이싱(Gazoo Racing)에서 드라이버로 활동하고 있다. 양복과 넥타이 대신 레이싱복과 헬멧을 착용하고 서킷을 질주한다.

전동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는 시각이 여전한 만큼 전기차의 운명은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수많은 완성차 제조사에서 전기차 원년으로 제시한 2030년 무렵이면 판가름이 날 전망이다. 이때면 74세의 나이로 은퇴와 가까워지는 도요타 회장에 대한 평가도 윤곽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남들과는 다른 선견지명을 가진 경영자와 시류를 오판한 경영자 중 어느 쪽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