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박민규 기자] LG화학이 양극재 등 배터리 소재에 대한 투자를 연기 또는 철회했다. 고객사 다변화를 이뤘다면 어땠을까. 자회사인 LG에너지솔루션(이하 LG엔솔) 외 고객이 한 군데라도 있었다면 투자 계획이 이렇게까지 대거 수정됐을까.
LG화학은 지난 25일 실적 콘퍼런스 콜에서 양극재 투자 계획을 대폭 조정했다. 연초 28만톤(▲중국 6만톤 ▲미국 1만톤 ▲국내 20만톤 ▲기타(모로코) 1만톤)으로 제시했던 2026년 양극재 생산 능력 목표를 20만톤(▲중국 6만톤 ▲미국 1만톤 ▲국내 13만톤)으로 하향하고, 2028년 47만톤 목표(▲중국·미국 각 6만톤 ▲국내 30만톤 ▲기타 5만톤)는 철회했다. 투자 계획 수정에 따라 당장 내년 목표인 17만톤(중국 6만톤, 국내 11만톤) 확보도 불확실해졌다.
히스토리를 살펴보면 연초 내놨던 투자 계획도 사실은 수정된 결과다. 모로코 투자만 해도 지난해 9월엔 2026년 양산을 목표로 연산 5만톤 규모의 리튬 인산철(LFP) 양극재 합작 공장을 짓는다는 계획이었다. 이후 연간 생산 능력 목표가 5만톤에서 1만톤으로 급감한 데 이어, 기약 없이 순연되기까지 했다. LG화학은 충북 청주에 구축한 LFP 양극재 라인의 양산 계획도 기존 2026년에서 2027년으로 미뤘다. 다만 개발 투자는 지속해서 검토하고 있고, 복수의 전기차 업체와 공급을 논의 중이라는 설명이다.
이와 함께 LG화학은 올해 양극재 출하량에 대한 전망치를 전년 대비 '40% 증가'에서 '20% 증가'로 하향 조정했다. 당장 올 3분기 고객의 재고 조정과 감산 등으로 2분기 대비 20% 정도의 물량 감소가 예측된다는 설명이다.
전방인 전기차 시장의 침체가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보수적인 투자 기조로 내실을 강화하겠단 취지는 합리적이다. 올해 들어 투자 축소를 발표한 배터리사들이 모두 이런 이유를 댔다. LG화학의 경우 순차입금 비율이 지난해 말 31.2%에서 올해 6월 말 39.7%로 치솟으면서 10개 분기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등 한층 높아진 채무 부담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LG엔솔 외에도 공급처가 있었다면 선택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똑같이 수요 위축 상황에 놓여 있는 경쟁사들도 기존에 결정한 투자는 이어나가고 있어서다. 포스코퓨처엠과 에코프로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포스코 퓨처엠은 LG엔솔 외에도 삼성SDI와, 에코프로는 삼성SDI를 주요 고객으로 뒀으면서도 SK온과 각각 거래하고 있다. 사실 양극재 업체 중 합작 법인을 제외하고 고객 하나에만 올인하는 사례 자체가 드물다.
하지만 LG화학은 자회사인 LG에너지솔루션(이하 LG엔솔)이 사실상 유일한 납품처다. LG엔솔의 수급 플랜이나 투자 속도 조절에 속절 없이 휘둘릴 수밖에 없다. 앞서 LG엔솔은 올해 5월 전년과 유사한 규모(약 10조9000억원)의 자본적 지출(CAPEX)을 집행하겠다는 입장을 번복, 결국 CAPEX 축소를 결정했다.
이에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전기차 산업이 호황일 당시엔 LG엔솔 물량만 생산해도 충분했겠지만, 이젠 (LG엔솔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독이 된 시점"이라며 "LG엔솔 외에도 삼성SDI를 고객으로 둔 포스코퓨처엠만 해도 NCA(니켈·코발트·알루미늄) 전용 공장 설립 등 기결정 투자 건을 이어 나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업계가 지적하는 문제는 또 있다. 고객 다각화를 위해선 제품군 다변화가 선행돼야 하는데, LG화학 경우 이 준비도 미비하다는 것이다. 박철완 서정대학교 자동차학과 교수는 "LG화학의 양극재는 현재 NCMA(니켈·코발트·망간·알루미늄)에 한정됐는데, 국내에서 NCMA 양극재를 적용하는 배터리사는 LG엔솔 뿐"이라며 "고객 다변화를 원한다면 NCA 등 다른 배터리 업체들이 찾는 제품도 만들든지, 해외에서 NCMA 적용 배터리사를 추가로 발굴하든지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LG화학도 고객 다변화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이 회사의 최고재무책임자(CFO)인 차동석 사장도 이날 양극재 생산 능력 증대의 선행 요건 중 하나로 고객 포트폴리오 확대를 꼽은 바 있다. LG화학이 매번 강조하는 '글로벌 배터리 소재 기업'은 고객 포트폴리오도 글로벌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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