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바이오투자가 시들시들해진지 오래다. 한때 창업만 하면 수백억원의 벤처투자를 받았던 시기의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고 있다. 이제는 바이오 기업 스스로 몸값을 낮춰도 투자를 하겠다는 제안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바이오 기업들의 연이은 모럴 해저드와 실적 부진 탓에 코스닥 시장에서도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는 바이오 투자 시장의 문제점은 과연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반등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까. 딜사이트에서 살펴봤다.
[딜사이트 한은비 기자] 최근 국내 바이오 투자업계는 세부 업종별로 분위기가 극명히 엇갈린다. 신약 개발 분야의 인기가 한풀 꺾인 반면, 의료기기·뷰티·헬스케어 산업은 떠오르는 추세다. 상대적으로 투자금 회수(엑시트) 기간이 짧고 제조 및 플랫폼 산업과 교집합을 이루는 분야에 투자금이 몰리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신약 개발 기업에 투자했던 자금이 엑시트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신약 개발사들이 기업공개(IPO)의 문턱을 좀처럼 넘지 못한 탓이 크다. 특히 파두 사태 이후 한국거래소가 기술특례상장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다수의 신약 개발사들이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바이오 투자업계 관계자는 "2020~2021년 바이오 벤처투자 호황기에 투자를 유치한 신약 개발사들은 현재 투자금 대부분을 소진한 상황"이라며 "1년 안에 후속 투자를 유치해야 하는 기업들이 많지만 IPO 성공 여부가 불분명해 자금이 잘 모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신약 개발사에 투자한 벤처캐피탈(VC) 입장에서는 엑시트 통로가 막히면서 돈맥경화에 빠져버렸다. VC는 유한책임투자자(LP)들로부터 자금을 조달해 펀드를 만든 뒤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구조다. 주로 기관투자가들로 구성된 LP들은 여유자금 중 일부를 벤처출자사업에 배정해 투자해왔다. 그런데 신약 개발사에 투자한 자금이 최근 연이어 묶이다보니 LP들이 바이오 산업에 투자할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발생한 것이다.
현금 유입이 사라지면서 신약 개발에 주력하는 바이오사는 유동성 부족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바이오 업계 관계자는 "대다수 회사들의 운영 자금이 모자라 임상 진행 중인 파이프라인을 절반 이상 줄였다"며 "인력을 정리하는 등 구조조정까지 단행하면서 생존을 위한 비용 절감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재기를 위한 신약 개발 스타트업 경영진들의 몸부림에도 VC들은 신약개발 분야 투자를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 VC 업계 관계자는 "바이오 연구 개발에 필요한 최소 자금이 100억원인데 엑시트가 워낙 불확실해 클럽딜(공동투자)을 꾸리기 여의치 않다"고 설명했다. 이어 "20억~30억원 규모의 단독 투자는 수개월 내에 자금이 눈 녹듯 소진되기 때문에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평했다.
반면 ▲원택 ▲클래시스 ▲파마리서치 ▲제이시스메디칼 ▲루트로닉 등 피부미용 의료기기와 헬스케어 관련 기업에 대한 투자는 활발하다. 신약 물질에 비해 실체가 분명한 의료 장비나 플랫폼은 실적과 비용 구조 파악이 용이해 거래소의 보수적인 심사 태도를 완화시킬 수 있다는 분석이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VC 심사역들은 펀드 투자로 수익을 극대화하고 성과급을 챙겨가는 구조"라며 "회수 여부도 불확실한데 매출 발생까지 오래 기다려야 하는 신약 개발보다는 당장의 자금 조달 이슈 없이 흑자를 내고 있는 의료기기나 의료 전문 플랫폼 등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오늘날은 의료 기술 발전에 따라 삶의 '연명'보다 '질'이 중요해진 사회"라면서 "노화 방지와 건강에 대한 현대인들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관련 업계를 향한 VC업계 종사자들의 관심이 높아진 경향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VC들이 수익을 최우선으로 삼고 투자 대상을 검토하는 현상은 당연한 일이지만 너무 단기적인 시각에만 매몰될 경우 신약 개발 벤처기업들이 싹을 틔워보지도 못하고 사멸할 수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일각에서는 미용 의료기기와 헬스케어 서비스가 혁신 의약품 개발 사업만큼 큰 수익률을 내긴 쉽지 않다고 바라본다. 일례로 과거 미국 헬스케어 기업 '눔(Noom)'은 코로나 팬데믹 기간 식단 관리 서비스로 데카콘(기업가치 10조원 이상 비상장사) 평가를 받았으나 오젬픽, 삭센다, 위고비 등 비만치료제가 등장하자 실적 부진에 빠졌고 결국 상장을 연기했다.
업계 관계자는 "의료 관련 장비나 서비스는 제조·플랫폼 성격이 강하다"면서 "사업 아이템 차별화가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사람들은 건강을 관리하는 데 유료 서비스보다 무료 서비스를 선호한다"면서 "헬스케어 플랫폼의 경우 매출이 나도 이익 폭이 작다"고 덧붙였다.
ⓒ새로운 눈으로 시장을 바라봅니다. 딜사이트 무단전재 배포금지